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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홍남기, 예스맨으로 남을건가

중앙일보

입력 2020.03.31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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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곤 논설실장

고비 때마다 발군의 경제부총리가 있었다. 박정희 정부에선 불도저 같은 추진력의 장기영, 실무를 꿰뚫었던 김학렬, 한강의 기적을 이끈 남덕우가 있었다. 그 후 정권이 바뀌어도 경제는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신병현·최각규·강경식 등 소신이 뚜렷한 인물이 경제부총리를 맡았다. 선거로 첫 정권교체를 한 김대중 정부도 ‘경제부총리=최고의 경제관료’라는 전통을 이어갔다. 호남 출신의 강봉균·진념·전윤철이 있었다.
 
노무현 정부도 경제부총리만큼은 자기 사람을 고집하지 않았다. 이헌재·한덕수 같은 보수 색채의 경제관료를 중용했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는 10년 만에 돌아온 강만수가 경제팀장을 맡아 노련하게 금융위기를 극복했다. 그 바통을 ‘경제관료의 맏형’ 윤증현이 넘겨받았다. 중량감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경제팀장은 딱 여기까지였던 것 같다.

위기 땐 경제부총리가 경제대통령
예전보다 중량감·카리스마 떨어져
이념 따를 말 잘듣는 사람만 쓴 탓
홍, 위기 극복위해 제 목소리 내야

이명박 정부 중반부터 인력풀이 점점 줄었다. 박근혜 정부는 경제부총리를 찾는데 더 애를 먹었다. 이명박 사람은 무조건 안 썼고, 김대중·노무현 사람도 꺼렸다. 차·포 떼고 고민하다 수첩인사를 했다. 악수(惡手)를 뒀다. 시장에 신뢰감·존재감을 주기 어려운 인물이 연이어 경제부총리가 됐다.
 
박근혜 정부의 실패가 문재인 정부에서 반복됐다. 1류 경제관료를 제쳐놓고, 출신과 색깔을 따졌다. 좌파 이념을 고분고분 따를 인물을 찾았다. 자연히 인력풀이 바닥났다. 경제부총리가 누군지 잘 떠오르지 않고, 예전만 못하다고 느끼는 이유다. 첫 경제부총리 김동연은 청와대 경제정책에 간간이 어깃장을 놓으며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탈원전 같은 반시장·반기업 정책을 막지 못한 책임이 있다.
 
홍남기 부총리는 ‘예스맨’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경제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도,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호한 태도로 일관했다. 한 달간 이어진 코로나 재난지원금 논의에서도 그가 신중한 입장이었다고는 하는데, 잘 보이지 않았다. 자기 돈 푸는 것처럼 생색을 낸 이재명 경기지사, 박원순 서울시장만 보였다. 얼마 전엔 홍 부총리가 추경 확대에 대해 모처럼 반대 의견을 냈다. 그러자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해임을 거론하며 아랫사람 책망하듯 했다. 이 대표가 무례한건지, 홍 부총리의 자업자득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10년 주기의 경제위기가 다시 찾아왔다. 위기는 이제 시작이다. 좌파정책 실험에 열중해온 경제팀도 진짜 시험대에 올랐다. 곧 실력이 드러날 것이다. 청와대 경제라인을 포함한 경제팀은 정치인·학자·시민단체 출신이 여럿 있는 약체다. 이런 위기를 처음 다뤄보고, 현장을 잘 몰라 디테일에 약하다. 저마다 대통령과 연이 닿아있는 실세라고 생각해 통솔도 쉽지 않다.
 
그동안 경제팀장이 누구인지도 분명치 않았다. 경제부총리는 뒷전이고, 청와대 정책실장(장하성·김수현·김상조)이 늘 시끄러웠다. 이들이 운동권 출신 청와대 ‘어공’(어쩌다 공무원)들과 경제정책의 큰 틀을 짰다. 경제관료는 여기에 살을 붙이는 조수 역할에 그쳤다. 경제부총리 패싱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밀어붙인 게 소득주도성장이다. 전 세계 유례없는 정체불명의 경제 정책이기도 하다.
 
그 결과 문재인 정부 3년간 세계 각국이 호황을 누릴 때 우리는 소득이 늘지 않고, 성장도 멈췄다. 지난해 명목 성장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중 34위다. 운 나쁘게도 기저질환 상태에서 위기를 맞았다. 충격과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좌파 이념에 젖어있는 청와대 정책실장이나 존재감 0%의 경제수석이 이 국면을 타개할 것 같지 않다.
 
위기를 헤쳐나갈 경제팀장은 미우나 고우나 홍 부총리다. 그에게 일생일대의 큰 장이 섰다. 실력으로 경제팀을 장악해야 한다. 목소리 큰 실세 틈바구니에서 눈치 보며 우물쭈물해선 곤란하다. 전장의 장수처럼 독하고, 무섭게 지휘해야 한다. 위기 때는 빠르면서도 정확한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다. 오랜 경험을 쌓은 경제관료가 아니면 하기 어렵다. 평생 특정 분야를 연구한 학자나 여기저기 옮겨다닌 정치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문 대통령도 홍 부총리에게 힘을 실어주기 바란다. 위기 때는 경제부총리를 여러 장관 중 한명쯤으로 여기면 안 된다. 자주 독대해 신속하게 교통정리 해주고, 그를 신뢰한다는 메시지를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그래야 눈치 빠른 대통령 주변 사람들이 그를 주목할 것이다. 시장도 만만히 보지 않게 된다.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했다.
 
홍 부총리 스스로도 권위를 세우는 게 급선무다. 압도적인 존재감과 리더십이 없으면 시장과 당·청에 끌려다니고,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경제를 정상궤도로 복원하려면 예스맨에서 벗어나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는 35년 차 경제관료다. 쟁쟁한 선배들로부터 지금 같은 경제운용을 배우진 않았을 것이다. 영민한 후배들도 지켜보고 있다. 영 자신이 없으면, 빨리 옷을 벗는 게 본인이나, 나라를 위해서나 좋다. 전 정권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자가격리 중인 1류 경제관료들이 찾아보면 생각보다 많다. 문 대통령이 1류를 구원투수로 쓸 생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현곤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