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신예 조아연(20)에 3타 차 선두로 경기를 시작한 박인비는 첫 홀에서 보기를 했지만, 3번과 4번 홀 버디로 도망갔다. 한때 6타 차 선두를 달렸다. 잠시 위기도 맞았다. 16번 홀 보기로 타수 차가 2로 줄었을 때다. 그러나 박인비는 다음 홀에서 버디를 잡아 깨끗하게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박인비는 경기 후 평소와 달리 무척 기뻐했다. 그의 동기인 신지애, 최나연, 이정은(5)과 유소연, 이미향, 이정은6 등이 샴페인을 퍼부으며 축하했다.
호주 여자오픈 정상 등극
다섯 차례 준우승 만에 우승 기쁨
한국선 박세리 이후 두 번째 20승
도쿄 올림픽 대표 경쟁 본격 시동
‘침묵의 암살자’라는 별명은 표정이 없다는 뜻도 있지만, 유능한 자객처럼 아무도 모르게 확실히 마무리한다는 의미도 있다. 박인비가 19승을 한 후로는 자객의 힘이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런 박인비가 23개월의 공백을 깨고 우승했다. 19승은 19일 19언더파로 우승했는데, 20승은 2020년 기록하게 됐다.
박인비는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여자골프 금메달을 딴 후 성적이 좋지 않았다. 손목과 허리 부상으로 고생했다. 골든 커리어 그랜드슬램(올림픽 금메달+4개 메이저대회 우승) 달성 후에는 딱히 더 이룰 것이 없었다. 2018년에는 몸이 아프지 않은데도 참가 대회 수를 확 줄였다. 은퇴를 준비했다.
박인비는 올해 다시 올림픽 출전을 위해 출사표를 던졌다. 세계 정상급 선수가 즐비한 한국 여자 골프의 경우 양궁처럼 태극마크를 다는 게 올림픽 메달 획득보다 어려울 수도 있다. 박인비는 현재 세계 17위다. 올림픽에 가려면 세계 랭킹 상위 15위 안에, 또 한국 선수 중 상위 4위 안에 들어야 한다. 16일 현재 한국 선수 중 고진영(1위), 박성현(2위), 김세영(6위), 이정은6(9위), 김효주(12위)가 박인비보다 위에 있다. 박인비는 여섯 번째다.
통계로 보면 요즘 박인비 실력이 20대 때만큼은 아니다. 2013년 3연속 메이저 우승 때 보였던 날카로운 퍼트 감각은 무뎌진 듯하다. 2012년부터 3년간 1위를 했던 그린 적중 시 퍼트 수 순위는 2018년 13위로, 지난해엔 26위까지 밀렸다. 샷 거리도 2012년 41위에서 지난해 145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박인비는 숫자로 드러나지 않는 기적을 만드는 선수이기도 하다. 올림픽이 열리는 2016년 박인비는 손가락 부상으로 경기에 거의 나서지도 못했다. 일부 팬은 기사 댓글로 ‘그 실력이면 올림픽 출전을 양보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인비는 부상 속에서도 출전을 강행했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 후 부상 후유증으로 또 한참을 쉬었던 박인비는 2017년 초 복귀하자마자 우승했다. 2017년엔 허리가 아파 하반기를 거의 쉬었다. 경기 감각이 부족한데도 2018년 복귀 두 번째 대회인 뱅크 오브 호프 파운더스컵에서 우승했다. 오랜 공백기를 보내고 복귀 뒤 곧바로 우승한 전례는 흔치 않은데 박인비는 세 번이나 했다.
이번 대회에서 박인비의 날카로운 자객 기질이 다시 번뜩였다. 바람은 꽤 강했고 그린은 아주 딱딱했다. 6, 8, 9, 10번 홀에서 박인비는 만만치 않은 파 퍼트 상황을 맞았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무표정하게 쑥쑥 집어넣었다. 실수가 실수를 낳게 않도록 하는 집중력과 대형사고를 내지 않는 안정감도 다시 나왔다.
이 대회 우승으로 박인비의 세계 랭킹은 훌쩍 뛰어오르게 된다. 올림픽에 나설 태극마크의 주인공이 누가 될지 아직은 짙은 안개에 싸여 있다. 짙은 안개 속에서 자객은 조용히 일본 도쿄로 갈 채비를 하고 있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