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권석천의 시시각각] 검찰이 민주주의를 지킨다?

중앙일보

입력 2020.02.1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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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 논설위원

지난주 수요일(5일) 오전 8시45분. 서울중앙지법 서관 2층으로 올라와 4번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출입구 앞에 이미 길게 줄이 서 있었다. 방청권 배부는 ‘재판 30분 전부터’라던데…. 낭패감이 스쳤다. 결국 ‘좌석’ 방청권은 앞쪽에서 끊겼다. ‘입석’ 방청권을 목에 걸고 424호 법정에 들어갔다.
 
오른쪽 피고인석에 안경 쓴 여성이 변호인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부인 정경심씨였다. 맞은편엔 수사 검사들이 앉았다. 오전 10시. 재판이 시작되자 검찰이 압수한 컴퓨터 등 디지털 자료에 대한 열람 등사 허용 결정을 놓고 공방이 오갔다.

헌법재판 방불케 한 정경심 법정
오만한 의무감서 권력화 시작돼
법률가답게 실체적 진실 지켜야

“디지털 자료에 포함된 민감한 개인정보에 대해 설명을 드린 바 있는데 그런 위험성을 가볍게 생각하시고….”(검찰) “피고인과 가족이 만들고 사용하던 것인데 왜 사생활 보호의 주체가 검사님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변호인)
 
검찰 측 증거들에 대한 서증조사가 이어졌다. 스크린에 계속해서 문서들이 올라왔다. 정씨와 조 전 장관, 정씨 동생, 조 전 장관 5촌 조카(조범동), 사모펀드 관계자들이 주고받은 문자와 카카오톡, 텔레그램, 그리고 진술 조서들이었다.
 
‘내 목표는 강남에 건물 사는 거야.’ ‘우리 다 윈윈해서 옛날 얘기 합시다.’ ‘텔레그램 만들기 바람.’ ‘폭망이야 ㅠㅠ.’ ‘엄청 거액이네.’ ‘(펀드 해명 자료를) 기타 언론사는 1시30분 이후 배포하시면 됩니다.’ ‘대응하지 말라고 하네요.’


검찰은 조국→정경심→펀드 관계자들→정경심으로 연결되는 통화내역을 제시하면서 “인사청문회 준비 기간 중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통화 패턴”이라고 했다. 저런 말들을 주고받았다니…. 날것 그대로의 워딩(말)들에 환멸이 느껴지던 그때, 나를 흔들어 깨운 것이 있었다. 검찰의 결론이었다.
 
“국민을 기망하고 범행을 은폐한 행위는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검증 권한을 침해한 것으로… 결론적으로 민주주의의 근간을 침해한 범행이고… 민주주의 사회로 유지되기 위해 국민 대표자들이 인사권을 행사하는데 기본 전제인 검증권한이 형해화….”  
 
헌법재판이 아닌 형사재판에서 나와야 할 단어들일까. 그것도 양형(형량 결정) 단계가 아니라 이제 막 증거를 다투는 단계 아닌가. “조국 후보자가 피고인(정씨)이 펀드의 투자처를 몰랐다고 하면서 인사청문회에서 입학 비리와 관련해서만 질문이 집중됐고….” 검찰은 지난해 9월 6일 인사청문회 종료 직전, 자신들이 왜 정씨를 기소해야만 했는지 그 불가피성을 납득시키려는 것 같았다.
 
검사는 오직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대해 법률로 말하면 되는 것이다. 왜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법률가를 검사로 일하게 하는가. 수사 과정에서 인권을 보장하고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다. 피의자 처벌이 검사의 유일한 존재 목적이라면 왜 법률가가 필요한가. 압수수색 잘하고, 조사 잘하고, 카카오톡과 텔레그램을 잘 오려 붙여서 스토리텔링 잘하는 사람을 검사 시키면 되지 않는가.
 
살아 있는 권력을 수사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조국과 청와대 인사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고,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6월 울산시장 선거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다만 검찰이 유죄 추정의 원칙으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게 자신의 역할인 양 착각해선 안 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자신들이 체제를 수호한다는 오만한 의무감에서 ‘신성가족’의 권력화는 시작된다. 수사 결과에 대한 평가는? 검찰의 비즈니스가 아니다. 언론과 학계가 알아서 할 일이다.
 
검사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들이 지켜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다. 검찰권을 위임받은 법률가들이 할 일은 무죄 추정의 원칙으로도 범죄가 되는지 끝까지 의심하면서 묻고 또 묻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검찰청 조사실이 아니라 투표소에서 시민들의 힘으로 지켜진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