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봉 감독이 동석하면 더욱 영광될 것이다. 지난해 11월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의 아름다운 예술인상 영화예술인 부문에 선정된 봉 감독은 당시 바쁜 미국 일정 때문에 시상식 현장에 오지 못했다. 봉 감독은 연세대 사회학과 재학 시절인 1994년 단편영화 ‘백색인’으로 신영청소년영화제 단편영화 부문 장려상을 받은 적이 있다. ‘기생충’이 현재 지구촌의 난제인 양극화 현상을 블랙 유머로 풀어냈다면 ‘백색인’은 우리 사회 인텔리들의 이기주의를 꼬집은 영화다. 영화학도 봉준호나, 세계적 스타 감독으로 거듭난 봉준호나 사회를 보는, 영화를 대하는 자세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또 내가 조연으로 나온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62년 한국영화 처음으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출품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빨간 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 제132화(7654)
<25> 할리우드 정복한 봉준호
선배 영화인으로 너무나 고마워
표현 제한 사라진 충무로의 승리
유신 검열에 걸린 ‘저 높은 곳을…’
제작 4년 만에 겨우 상영 판정
“고맙다, 후배들아” 가슴이 뭉클해져
그렇다. ‘기생충’의 영예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닐 터다. 좋든 싫든 지난 한 세기 뿌려온 충무로의 씨앗이 이번에 알찬 열매를 맺은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표현과 상상의 폭을 넓히려고 부단하게 노력해온 선배 영화인들의 노고를 돌아보게 됐다. 한국영화 100년사는 검열과 통제를 딛고 일어서려는 충무로의 도전사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60년대 밤잠도 설쳐가며 충무로 현장을 누빈 내가 70년대 이후 연기 일선에서 멀어진 데에는 정부의 영화 검열이 크게 작용했다. 당국의 통제가 거세지면서 한국영화를 보는 재미가 떨어졌고, 관객들도 서서히 등을 돌리게 됐다. 나도 영화보다 사업에 더 신경을 쓰게 됐다.
출연작 300여 편 중 내 마지막 작품으로 흔히 윤정희와 함께한 ‘화조’(1978)가 꼽히지만 사실 극장가에 가장 늦게 개봉한 작품은 임원식 감독의 ‘저 높은 곳을 향하여’다. 77년에 제작을 끝냈지만 일반 극장가에 걸린 것은 그보다 4년 뒤인 81년에 들어서다.
하지만 77년 내가 운영하던 명보극장에 간판을 올린 첫날부터 시련에 부딪혔다. “검열에 걸려 상영할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됐다. 검열 당국은 뚜렷한 사유도 밝히지 않았다. “대체 뭐가 문제가 되느냐”며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누구 하나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유가 황당했다. 영화에서 주기철 목사의 아내로 나오는 배우 고은아씨와도 가끔 당시 얘기를 나누곤 한다.
일제강점기 주기철 목사 일대기 다뤄
▶고은아=“박정희 대통령이 살아계실 때 많은 목사님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에 들어갔어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영화인데, 그런 저항의 메시지가 당시 유신정권 말기에 눈에 걸렸나 봅니다.”
▶나=“중앙정보부가 상영을 막았다고 합니다. 반체제운동을 조장할 수 있다고 판단한 거죠. 교계에서도 영화를 둘러싸고 소문이 많이 났어요. 80년대 신군부 검열관이 최종 상영 판정을 내렸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죠.”
‘저 높은 곳을 향하여’는 81년 개봉 당시 20만 관객을 동원할 만큼 흥행에 성공했다. 사실상 내 마지막 작품이 됐다. 이 영화는 원래 서울 평창동에 세운 연예인교회(현 예능교회) 건립비를 대려고 만들었다. 지금도 같은 교회에 다니는 고은아씨의 남편 곽정환 합동영화사 회장이 제작을 맡았다. 늦게나마 영화가 성공한 까닭에 기독교 연예인들의 성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할리우드 정상에 선 ‘기생충’을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 92세 노배우의 과욕이겠지만 젊은이들의 패기가 그리워졌다. 하지만 어디 배우에게 은퇴가 있으랴. 좋은 작품이 나오면 꼭 한번 출연하고 싶다. 영화 제목처럼 저 높은 곳을 향하여로 말이다. 어제 봉준호 감독이 수상 소감에서 “밤새 술 마실 준비가 돼 있다”며 즐거워했다. 그가 돌아오면 꼭 한 잔 같이하고 싶다. ‘기생충’ 스태프들 모두 함께 오면 더욱 좋겠다. 충무로의 또 다른 비약을 기약하면서 말이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