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난 어린애였고 TV에서 대통령 사진이 계속 나왔죠. 길에선 소복을 입은 할머니들이 통곡을 하고…. ‘뭔가 나라에 큰일이 생겼구나’ 했던 기억이 나요.”
1979년 10월26일 서울 궁정동 밤하늘에 울렸던 총성은 배우 이병헌에게 흑백 뉴스 이미지로 남아있다. 41년 뒤 스크린에서 그는 시바스 리갈 위스키 병을 앞에 둔 18년 장기 집권 대통령을 독일제 권총으로 쏜다. “혁명의 배신자로 처단한다”는 말과 함께. 이것이 실화라면 그날 밤 그 사건까지 한국 권력 수뇌부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내부자들' 감독과 재회한 '남산의 부장들'
박정희 최후 둘러싼 2인자들 암투 그려
"시기와 충성 경쟁…인간 이야기에 끌려"
2인자의 불안과 분노…절제된 연기 압권
‘웰메이드’의 상당 부분은 정교하게 고증된 당시 인물과 풍경에 힘입었다. 집무실 한쪽 벽을 채운 나폴레옹풍의 1인자 초상화라든가 ‘대한뉴스’에서 빠져나온 듯한 담배‧안경 등 소품이 몰입감을 더한다. 파리‧워싱턴에서 로케이션한 이국적인 풍경에다 1970년대 복장 덕에 복고풍 스파이물 느낌도 난다. 반전 없는 결말까지 113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 실존 인물에 부담은 없었나. 연기하면서 가장 큰 고민은?
“우리 근현대사의 가장 드라마틱하고 큰 사건이지 않은가. 감정을 연기하는 배우로서 그런 상황의 미묘한 심리를 해보고 싶었다. 물론 개인감정이나 생각을 담을 수 없고 갇힌 틀 안에서 자유롭지 않은 건 있다. 대신 시나리오 안에서 그 인물이 가진 심리 상태와 미묘한 감정들에 최선을 다해서 표현하고 몰입하자고 생각했다.”
“머리카락 매만지기, 실제 인물에서 힌트”
영화는 1990년부터 2년2개월 간 한 일간지에 연재됐던 동명의 취재기를 기본 사료로 했다. 선후배 관계였던 김형욱-김재규가 친구이자 ‘혁명 동지’로 설정됐다거나 로비스트 데보라 심(김소진) 등 허구의 인물이 등장하는 등 가공도 거쳤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파리 유인 암살사건은 여러 ‘설’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그리고 가장 끔찍한) 걸 기반으로 했다. 15년 전 ‘그때 그 사람들’(감독 임상수)이 권력 주변부 풍경을 중심으로 당시 세태를 우화적으로 그렸다면 이번 영화는 2인자들의 과열된 충성 경쟁 등 핵심 인물의 심리에 포커스를 맞췄다.
-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부담이 있을 법한데.
“난 정치를 잘 모르고 그런 쪽에 지식도 많지 않다. 사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도 ‘내부자들’도 사람들이 그렇게 정치적으로 볼 줄 몰랐다. 그냥 극중 인간의 관계와 감정에 끌려서 (출연을) 결정할 뿐이다. 이 영화도 정치 이야기라고 보지 않는다. 서로 시기하고 충성 경쟁하고 1인자‧2인자 간에 갈등이 벌어지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 실은 찍으면서 우리끼리 그렇게 자화자찬했다(웃음).”
“역사의 미스터리, 애써 단정 안내려”
“옆방 벽장에서 박통을 도청할 때 장면인데, 처음엔 무슨 얘기 하나 귀 기울이다가 대통령이 홀로 노래하는 걸 들으며 자신도 함께 감상적이 되는 상황이다. 일단 한번 찍고 모니터 하면서 보니 안경테에 빗방울이 아슬아슬 달린 게 묘한 느낌을 주더라. 다시 클로즈업 찍을 땐 똑같이 물기를 장착했다.”
대통령의 삽교천행 헬기에 자리를 얻지 못해서, “탱크로 100만, 200만명 밀어버리자”고 부추기는 꼴을 못 참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하라던 주군의 변심에 좌절한 김 부장의 폭주는 역사를 뒤바꾼 총성으로 이어진다. 그간 드라마, 재현극, 영화를 통해 숱하게 되풀이된 장면이지만 이병헌의 기쁜 듯 슬픈 듯 멍한 표정은 백마디 말 이상의 혼돈을 압축한다.
“가장 존경하고 사랑한 어떤 인물의 피를 본다고 생각해보라. 그 피에 미끄러지고 양말은 온통 피에 젖어 있고…. 어떤 결단·집념보단 그런 감정에 집중했다. 영화 찍기 전부터 감독님과 얘기한 게 역사에서 미스터리로 남은 것은 영화에서도 미스터리로 남기자고 했다. 그래서 끝난 후에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한다.”
함께 한 배우들에 대해선 아낌없는 신뢰를 드러냈다.
“이성민 배우는 집무실이 첫 만남이었는데 분장하고 나오는 모습만 보고도 ‘와’ 감탄스러웠고 연기에 더 도움이 됐다. 곽도원 배우는 감정을 상대와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 선수다. 찍을 때마다 어떻게 그렇게 다양하게 변주하는지 마술사 같았다. 이희준 배우에겐 흠칫흠칫 놀랐다. 있는대로 소리 지르고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주는데 덕분에 (화 나는) 감정이입이 잘 됐다(웃음).”
“아카데미 투표권, 이번에 처음 행사할 것”
“지난 10월에 LA 가서 업계 사람들 만났는데 ‘기생충’이 뜨거운 걸 직접 느끼고 왔다. 같은 배우로서 솔직히 부러운 부분도 있지만 누군가 이렇게 뚫어줘야 앞으로 한국영화가 힘을 받을 수 있으니 자랑스럽고 기분 좋다. 사실 나도 투표권 있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인데 그간 한번도 안했다. 이번엔 드디어 행사해 보려고 한다.(웃음)”
차기작은 한재림 감독의 영화 ‘비상선언’. 아카데미의 남자 송강호와 함께 한다. 둘의 만남은 ‘공동경비구역 JSA’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밀정’에 이어 네 번째다. 연내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히어’(HERE)도 예정돼 있다.
마지막으로 “혹시 정치 제안 받은 적 있나?” 하고 물었다.
“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1시간 인터뷰 끝에 그의 동공이 처음으로 전구처럼 커진 순간이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