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격호, 시게미쓰 타케오(重光武雄), 롯데그룹 창업주.
19일 별세한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선구적 경계인이었다.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롯데라는 제국을 일궜다. 심한 경상도 사투리와 모국어만큼 편한 일본어를 섞어 썼다. 양쪽에서 환호와 의심을 동시에 받았다. 일본에서 사업가로 성공하자 귀화하라는 권유도 빈번했다. 한국 사람이 일본에서 돈만 벌어 간다는 조롱과 비방을 일본에서 듣기도 했다. 신격호의 99년 삶엔 빛과 그림자, 그리고 모호한 회색지대가 공존한다.
맨손으로 국내 그룹 재계 5위 롯데그룹을 일군 1세대 창업자로 한창때는 “홀수달에는 한국에서, 짝수달에는 일본에서”로 요약되는 스케줄을 소화하며 그룹을 지휘했다. ‘대한해협의 경영자’ ‘신(神)격호’ 등의 별칭을 얻었다. 모국어보다 일본말에 능숙했지만, 한국 국적을 바꾼 적은 없다. 83엔을 들고 1942년 일본에 간 그는 48년 일본 롯데, 67년 한국 롯데를 세운 후 90여개 계열사, 자산 규모 115조원으로 키웠다. 불호령과 꼼꼼함으로 직원을 떨게 했지만, 댐 건설로 수몰돼 사라진 고향(울산 둔기리) 사람을 위해 43년간 매년 5월 첫째 일요일, 위로 잔치를 열기도 한 재계의 거인이었다.
83엔 들고 밀항선 탄 '문청'
숙부의 도움으로 2년제 농업 보습학교를 졸업한 뒤, 41년 단돈 83엔을 들고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신문·우유 배달을 하며 와세다 고등공업학교 화학과를 마쳤다.
특유의 꼼꼼함과 고객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신의성실의 원칙은 이때부터 빛을 발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유 배달 시간이 정확했다. 입소문이 나 몰려드는 주문에 배달 시간을 맞추기 어렵자 직접 아르바이트를 고용했다. 아르바이트가 아르바이트를 고용한 것이다. 이런 모습에 반한 일본인이 사업 자금 6만엔을 대줘 선반용 기름 제조사업을 시작했다.
롯데그룹 그 시작, 풍선껌
배고픈 시절 밥도 안되는 간식으로 성공할 수 있겠냐는 회의적인 시각을 넘고 롯데 풍선껌은 줄 서서 사는 제품에 올랐다. 문학 청년의 감수성을 살려 ‘입속의 연인’이라는 감성적인 카피로 소비자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일본 경제가 살아나면서 껌 소비는 증가했고 롯데는 10여년 만에 최고의 껌 메이커가 됐다. 소공동 롯데호텔 34층, 신 회장의 집무실엔 당시 판매된 ‘롯데 그린껌’ 사진이 붙어있다.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이후 롯데는 초콜릿과 캔디류, 빙과류 시장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 나가면서 일본의 대표 식품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롯데는 이어 식품을 기반으로 상사(1959), 부동산(1961), 물산(1968) 등으로 확대하며 급성장했다. 88년 일본 경기 호황으로 신격호 회장은 포브스 선정 세계 부자 4위에 오르기도 했다.
한일 수교 뒤 역진출
신 명예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51년부터 시작된 한일회담의 진행 과정을 관심을 갖고 지켜보면서 조국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롯데 관계자는 “모국에 대한 투자 계획은 50년대에 이미 싹을 틔우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한국으로 건너와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소공동 국립중앙도서관 자리에 지하 3층 지상 38층의 1000여 객실을 갖춘 롯데호텔 건설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비보다 많은 1억5000만 달러가 투자됐다. 70년대 서울에 ‘동양 최대의 마천루’를 짓겠다는 발상은 무모해 보였지만 6년 건설 끝에 현실이 됐다. 신격호는 호텔 롯데를 ‘혈육’으로 여길 만큼 애착을 쏟았다.
신 명예회장이 유통업과 관광업에 관심을 둔 이유는 “특별한 자원을 들이지 않고도 외화를 획득할 수 있는 사업(롯데 50년사 2017년)”이었기 때문이다. 신 명예회장은 유통업이 활발해지면 산업 전반에 걸쳐 생산과 소비의 선순환 구조가 형성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소공동 호텔부지 부속 건물 일부를 백화점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75년 이미 10층 규모의 백화점을 세우고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면세점을 포함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만들었다. 79년 12월 17일 롯데쇼핑센터(현 백화점) 개관일엔 서울시민 30만명이 몰렸다. 당시 수도권 인구가 800만명이었다. 롯데쇼핑센터는 개점 100일 만에 입장객 수 1000만명 기록을 세우면서 서울의 랜드마크가 됐다.
신 명예회장은 잠실에 처음 롯데월드 건설을 추진할 때 반대에 부닥쳤다. 황량한 모래벌판이었던 터는 비가 오면 한강 범람을 걱정해야 했다. 반대하는 임직원들에게 "상권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상품과 수준 있는 서비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1년만 지나면 교통체증이 날 정도로 상권이 발달할 것"이라던 신격호의 '예언'은 현실이 됐다.
호텔업은 이후 유통업과 리조트업과 면세점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했고 한류 붐을 타고 2000년대 초부터 급성장할 수 있었다.
79년 공기업이었던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을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신 명예회장은 현 롯데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 화학부문 기틀을 세웠다.
롯데호텔 지을 땐 의자 숫자까지 확인
신 명예회장은 백화점이나 마트, 호텔 현장에 주말에 불쑥 나타나는 것으로 유명했다. 어디에 와서 점검할지 몰라 직원들이 항상 마음을 졸였다. 77년 롯데에 입사한 소진세 롯데그룹 고문(교촌 회장)은 생전의 신 회장을 “참으로 엄격하고 꼼꼼했던 분”이라고 기억했다. 소 고문은 "롯데 호텔을 세울 땐, 일본에서 들여오는 각종 기자재와 의자 숫자까지 일일이 파악했다"고 전했다.
셔틀경영으로 한국에 있을 땐 롯데호텔 34층 집무실에서 매일 여러 계열사 대표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신 회장은 꼼꼼하게 메모를 하면서 의문 사항을 물어봤는데, 대표들이 관련 숫자를 머릿속에서 얘기하지 못하고 자료를 뒤적거리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