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영화산업의 꽃 오스카를 가리켜 “로컬”이라고 했던 봉준호(51)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 92년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새겼다. 한국어·한국 자본으로 만들어진 ‘토종’ 한국 영화 ‘기생충’을 오스카 작품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려놓으면서다. 한국 영화 101년 사상 첫 오스카 후보가 된 ‘기생충’이 작품상을 탄다면 아카데미 역사상 첫 비영어권 수상이라는 금자탑을 세우게 된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에 거머쥔 영화도 지금껏 미국 델버트 맨 감독의 로맨스 영화 ‘마티’(1955년 황금종려상, 1956년 아카데미 작품상) 이후 한 번도 없다.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 감독이 오스카 작품상까지 탈 경우 64년 만의 새 기록을 세우게 된다.
‘기생충’ 아카데미 6개 부문 후보 올라
작품상 받으면 첫 비영어권 수상
역대 6번째 국제영화상과 동시후보
외신 “그동안 한국영화 무시해왔다”
특히 프로듀서가 수상하는 작품상 부문에서 봉준호 감독은 아시아 출신으론 세 번째 수상 후보에 올랐다. 봉 감독은 제작사인 바른손 E&A 곽신애 대표와 ‘기생충’의 공동 프로듀서를 맡았다. 앞서 대만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이안 감독이 2회(‘와호장룡’‘라이프 오브 파이’) 후보에 오른 바 있다. 인도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한 프로듀서 이스마일 머천트도 ‘전망 좋은 방’ 등으로 3회(감독은 제임스 아이보리) 노미네이트됐다.
‘백인 일색 오스카’에 다양성 더해줘
이날 최다 노미네이트는 코믹스 원작의 ‘조커’로 총 11개 부문이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아이리시맨’‘1917’(이상 10개 부문)이 뒤를 이었고 ‘기생충’과 함께 ‘결혼이야기’‘작은 아씨들’‘조조 래빗’이 각 6개 부문이다.
‘기생충’의 작품상 후보 지명에 대해 외신들도 일제히 ‘될 만했다’는 반응이다. ‘버라이어티’는 “한국 영화의 풍부한 역사를 고려할 때 아카데미 회원들은 그간 이 나라 영화를 무시해온 셈”이라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기생충’이 지난 수 주간 몰고 온 열기에 힘입어 국제영화상 이외 다른 주요 부문에도 호명된 걸 주목할 만하다”고 썼다.
봉준호 “영화 ‘인셉션’처럼 꿈만 같다”
봉 감독은 벅찬 소감을 감추지 못했다. 데드라인은 그가 “마치 (영화) ‘인셉션’에 있는 기분이다. 곧 깨어나 이게 모두 꿈이었다고 깨닫게 될 것만 같다. 아직 ‘기생충’ 촬영 현장에 있고 모든 장비는 고장 난 상태고 밥차에 불이 난 걸 보고 울부짖고 있고…”라고 농담했다고 전했다. 봉 감독은 “하지만 지금 당장은 모든 게 멋지고 매우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또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선 “미국 및 세계 관객이 더 많은 외국어 영화들을 포용하는 중”이라며 “‘기생충’이 미국에서 거둔 성공이 이를 잘 반영한다”고 말했다.
북미 배급사 ‘네온’은 오스카 작품상 후보 발표 때 배우 송강호 등의 반응을 트위터 동영상으로 올리면서 “당신 영화가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됐는데 (손에 든) 커피를 쏟지 않은 것만으로도 글로벌 수퍼스타 감이다”라고 하면서 영화 대사를 인용해 “송강호…. 리스펙트”라고 재치있게 덧붙였다.
이번 노미네이션으로 ‘기생충’의 북미 흥행에도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지난 주말까지 미국 극장 매출이 2535만 달러(약 292억원)로 역대 개봉 외국어 영화 흥행 7위에 안착했다.
한편, 올해 아카데미상에선 이승준 감독의 세월호 다큐 ‘부재의 기억’도 단편 다큐 부문 후보에 처음 올랐다.
총 24개 부문 수상작은 제작자, 감독, 배우 등으로 구성된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 8000여 명의 부문별 투표로 결정된다. 후보작 투표는 이달 30일 시작돼 2월 4일 마감한다. 시상식은 다음 달 9일 오후 LA 할리우드 돌비극장(옛 코닥극장)에서 열린다.
강혜란·나원정 기자 theothe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