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도 그 승객 중 한 명이다. 외곽 도시에서 서울 중심부의 직장을 오가려면 출·퇴근 시간이 만만찮다. 편도 1시간 30분은 족히 잡아야 한다. 왕복 3시간을 길바닥에서 보내는 셈이다. 그런데 옆자리에 앉은 동료 부장은 회사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산다. 가끔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한 뒤 이렇게 말하면서 경기도 주민의 속을 뒤집는다. “직장과 집이 가까운 ‘직주근접’이야말로 행복지수를 높이는 지름길이라니까요. 허허허….”
집과 직장 가까워야만 행복할까
빨간 버스는 수도권 주민의 발
오늘도 희망 싣고 싱싱 달린다
빨간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면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생긴다. 이른 아침 버스를 탄 승객들은 눈을 감고 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드르렁드르렁 코까지 곤다. 이런 승객이 한두 명이 아니여서 종종 코 고는 소리가 하모니를 이룬다. 앞머리에 헤어롤을 감고 버스에 오른 뒤 천연덕스럽게 메이크업을 하는 여자 승객도 있다. 만원 버스 안에서 선 채로 화장을 하는 신공을 선보이는 승객을 본 적도 있다. (그런데 왜 민망함은 보는 사람의 몫이던가) 술 한 잔 걸친 퇴근길엔 깜빡 잠이 들어 종점까지 가는 경우도 왕왕 있다.
삭막한 세상이라지만 우리 주변엔 마음이 따뜻한 사람도 제법 많다. 하루는 퇴근길 만원버스에 할머니 한 분이 올라타셨다. 언뜻 보아도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연세가 지긋한 분이었다. 빈자리가 없어서 할머니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찰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회사원이 번쩍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할머니는 “아이고, 미안해서 어떡하나”를 연발하면서 자리에 앉으셨다. 빨간 버스를 타본 사람은 안다. 광역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를. 그런데도 그는 1시간 가까이 서서 가면서도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나는 자리를 선뜻 내준 그 젊은 회사원을 보면서 부끄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새해가 밝았다. 어렸을 때는 2020년이 되면 하늘에 차가 붕붕 떠다닐 거라고 믿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직도 우리는 이른 아침 만원버스를 타고 졸린 눈을 비비며 일터로 향한다. 서울의 아파트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나라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시끄럽지만, 승객을 가득 태운 빨간 버스는 오늘도 희망을 싣고 달린다. 경자년 한 해, 대한민국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정제원 중앙일보플러스 스포츠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