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MLB는 비디오 판독 제도를 도입했다. 비디오 리플레이 화면을 통해 판정을 재심하는 제도다. 인간(심판)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다. 불과 4년 만에 ‘리플레이 룸’이 범죄의 온상이 됐다. 각 구단은 그곳에서 심판 판정을 체크한다. 비디오 판독 요청은 횟수를 제한(1회 성공하면 1회 추가)한다. 구단이 먼저 화면을 보고 이 정보를 감독에게 전달한다. 이에 따라 판독 요청 여부를 결정한다.
보스턴, 비디오 장비로 사인 훔쳐
공정 판정 위한 기술 악용 논란
변화 발맞춰 룰과 윤리 마련해야
롭 맨프레드 MLB 커미셔너는 “철저하게 조사하고 책임을 묻겠다”고 선언했다. 그렇다고 이번 스캔들이 잦아들 것 같지는 않다. 휴스턴 구단은 조사에서 “사인을 훔친 건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다른 구단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팀도 규정을 위반했다는 게 놀랍지만, 최근의 사인 훔치기는 인간의 경쟁에 ICT가 끼어들었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스포츠의 본질·가치를 훼손할 수 있는 거대한 위기다.
사인 훔치기 논쟁은 130년 야구 역사에서 자주 등장했다. 과거에는 상대 사인을 간파하는 건 능력이고, 오히려 들킨 쪽이 잘못이라는 통념이 있었다. 1980년대 주루 코치가 사인을 내는 포수의 팔뚝을 보고 구종을 읽어냈다는 전설 같은 에피소드가 내려온다. 눈썰미가 야구 기량의 하나이던 시절이다.
보스턴의 사인 훔치기가 과거와 다른 점은 기계가 인간의 눈과 두뇌를 대신했다는 점이다. 사람의 힘과 기술을 쓰는 것 같아도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 지시대로 포석하던 모습과 일부 닮았다. MLB뿐만 아니라 전 세계 스포츠 전반이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MLB는 이르면 2022년 ‘로봇 심판’을 도입할지 고려 중이다.
AI가 인간을 대체하고, 결국 사람을 공격한다는 내용의 영화 ‘터미네이터’는 1984년 개봉했다. 인간이 AI 시대의 윤리를 고민하고 답을 찾는 속도보다 기술 발전 속도가 더 빠르다. 더구나 비디오 판독은 로봇이나 AI 이전 단계의 기술인데도, 도입 4년 만에 이를 역이용한 부정이 벌어졌다.
그깟 공놀이에 ‘속임수(cheating)’ 좀 쓰면 어떠냐고 말할 수도 있다. 사인 몇 번 훔쳐봐야 승패를 바꿀 수는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스포츠는 공정이 생명이다. 조직적 부정은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도 충격이다. 약물 복용은 개인적 부정이지만, 사인 훔치기는 조직적 부정이다.
야구가 첨단 기술을 따라가면서 놓친 것이 몇 가지 더 있다. ICT 기술 적용에 따른 보안 문제다. 보안만큼, 그 이상 중요한 건 윤리다. AI 시대를 맞아 야구(더 넓게는 스포츠)에 어떤 윤리 규범이 필요할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야구를 인간의 힘과 기술·두뇌의 대결로 놔둘지, 아니면 분석·판단은 ICT에 맡기고 인간은 근육만 쓸지. 논의의 시작이 늦어질수록 인간의 의지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지 모른다.
김식 야구팀장 see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