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우린 단 하나의 언어를 쓴다, 그 언어는 영화다”

중앙일보

입력 2020.01.07 00:04

수정 2020.01.07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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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단 하나의 언어를 쓴다고 생각합니다. 그 언어는 영화입니다.(I think we use only one language, the cinema.)”
 
골든글로브 트로피를 쥔 왼손 검지를 치켜올리며 봉준호(51) 감독이 영어로 ‘원 랭귀지(one language)’를 말할 때 카메라가 시상대 아래 앉아 있는 러네이 젤위거 등 할리우드 배우·감독들을 비췄다.  ‘로컬’이지만 글로벌을 이끄는, 연 434억 달러(약 50조8000억원, 2017년 기준) 규모의 미국 영화시장을 대표하는 스타들이다. 빈부 격차와 계급사회의 희비극을 묘사한 ‘기생충’의 감독은 이들 앞에서 ‘영화’라는 하나의 언어로 소통하는 세상을 말했다. 1919년 일제강점기 ‘의리적 구토’를 시작으로 달려 온 한국영화가 101년 만에 거둔 쾌거다.

‘기생충’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한국영화 101년 만에 미국에 깃발
아카데미 수상 가능성도 높아져

오바마·가디언 ‘올해의 영화’ 꼽아
구로사와 감독은 후보만 다섯 차례


봉 감독 “한국은 매우 다이내믹
BTS 파워 저의 3000배 넘을 것”

“1인치 자막 넘으면 더 많은 영화 만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5일(현지시간) 열린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한국영화 첫 골든글로브상을 받은 봉 감독이 시상식이 열린 LA 베벌리힐튼 호텔에서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역대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에서 아시아 영화의 대명사는 일본이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5차례 후보에 오른 것을 포함해(‘붉은 수염’ ‘가게무샤’ ‘란’ 등) 일본 영화가 후보에 오른 것만 10여 차례다. 아시아 영화의 해당 부문 수상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일본 배우들과 만든 일본·미국 합작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2007년) 이후 13년 만이다.
 
5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LA) 베벌리힐튼 호텔에서 열린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기생충’의 수상은 어느 정도 예견된 바였다. 지난해 제72회 칸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53개 해외영화제에 초청돼 15개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30여 개 해외 시상식에서 주요 부문 수상을 해왔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2019년의 영화’로 꼽을 정도였다. 영국 가디언도 지난해 말 ‘꼭 봐야 할 올해의 영화’ 50편을 추리면서 맨 처음 ‘기생충’을 꼽았다. 봉 감독도 이날 시상식에 앞서 레드카펫 인터뷰 때 “개인적으로는 오늘 이벤트를 여러 스타를 보며 즐기고 싶지만 한국은 (영화)산업 입장에서 역사적인 날”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마침내 외국어영화상에 호명되자 상기된 표정으로 시상대에 오른 그는 “놀라운 일이다. 믿을 수 없다”면서 영어로 운을 뗀 뒤 한국어로 “1인치 정도 되는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들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생충’이 유수의 영미 영화들에 견주어 부족함이 없다는 자신감이 비쳤다. 이어서 “오늘 함께 후보에 오른 페드로 알모도바르, 그리고 멋진 세계 영화 감독님들과 함께 후보에 오를 수 있어 그 자체가 이미 영광”이라고도 했다. 함께 노미네이트된 감독상 및 각본상 수상은 불발됐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를 두고 “골든글로브상 투표권을 쥐고 있는 이들이 ‘기생충’의 봉 감독에게 한 표를 던졌다면 멋진 커브볼(curve ball·변화구)이 됐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봉 감독은 시상식 후 무대 뒤 인터뷰에선 “지난해 칸에서 좋은 경사(황금종려상)가 있었는데 (한국영화) 101년을 맞아 골든글로브에서 좋은 일이 생겼다”며 한국영화의 역사를 강조했다. 또 이 영화가 “가난한 자와 부자 이야기인데, 미국은 자본주의의 심장 같은 나라라 뜨거운 반응이 있다”면서 “정치사회적 메시지도 있지만 이걸 친근하게 전달해 준 배우들의 매력 덕분”이라며 수상의 영광을 나눴다.
 
또 다른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에선 “제가 골든글로브에 와 있긴 하지만 BTS(방탄소년단)가 누리는 파워는 저의 3000배는 넘을 것”이라며 “그런 멋진 아티스트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나라, 감정적으로 매우 격렬하고 다이내믹한 나라”라는 말로 한국 문화의 공통 DNA와 저력을 강조했다. 이미경 CJ그룹 부회장, 출연 배우 송강호·이정은·조여정, 공동 각본가 한진원 작가와 함께 현장 중계 화면에 포착된 제작자 곽신애(바른손이앤에이) 대표는 “기쁘다. 이 수상이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중앙일보에 전했다.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가 주관하는 골든글로브는 아카데미(오스카)와 함께 미국 영화계 양대 시상식으로 불린다. 아카데미 전초전인 골든글로브를 수상하면서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 가능성도 한층 커졌다. 다음달 9일 열리는 제92회 시상식에서 ‘기생충’은 외국어영화상 외에 주제가상(‘소주 한 잔’) 등 2개 부문 예비후보 명단(쇼트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있다. 최종 후보 및 작품상·감독상 등 본상 노미네이트 여부는 오는 13일 발표된다.
  
‘기생충’ 북미 흥행 ‘일 포스티노’ 제쳐
 

영화 '더 페어웰'로 아시아계 첫 여우주연상을 받은 한국계 배우 아콰피나. [로이터=연합뉴스]

‘기생충’은 지난 10월 북미 개봉 후 상영관 수를 최대 620개까지 늘리며 장기 상영 중이다. 박스오피스 모조에 따르면 지난 주말인 5일까지 ‘기생충’(영어제목 Parasite)은 2390만 달러(약 279억원)를 벌어들였다. ‘일 포스티노’(1995, 2180만 달러)를 제치고 외국어영화 역대 흥행작 8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역대 7위인 ‘무인 곽원갑’(Fearless, 2006, 2460만 달러) 자리도 넘볼 전망이다.
 
이날 최다 수상작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다.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과 함께 각본상(타란티노), 남우주연상(브래드 피트)을 받았다. 봉 감독이 놓친 감독상은 제1차 세계대전 실화 영화 ‘1917’의 샘 멘데스 감독이 드라마 부문 작품상과 함께 가져갔다. 지난해 한국계 할리우드 배우 산드라 오(TV 부문 여우주연상)에 이어 아시아계 배우의 수상도 이어졌다. 한국계 어머니와 중국계 아버지를 둔 래퍼 겸 배우 아콰피나(본명 노라 럼)가 중국계 미국 여성의 가족영화 ‘더 페어웰’로 영화 부문에서 아시아계 첫 여우주연상 수상자가 됐다.
 
강혜란·나원정 기자 theothe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