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인] 박항서 감독
꿈, 도전 그리고 성취. 누구나 갈구하지만 쉽사리 잃곤 한다. 그는 달랐다. 예순이던 2017년 9월 낯선 나라로 갔다. 축구 인생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러자 매직이 펼쳐졌다. 박항서 베트남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이다.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
각자 맡은 임무 제대로 해내야
팀이 최선의 결과물 낼 수 있어
밖에 나오니 국내 갈등 더 잘 보여
마음 모을 수 있는 길 고민했으면
인도네시아 축구팀 맡은 신태용
적 아닌 파트너로 함께 발전할 것
“지금 63세인데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70? 내 감독 수명이 7년밖에 없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뭘 해야 할까, 뭘 해야 의미가 있을까, 왜 남한테 상처 주는 소리를 하지, 뭐하러 싫은 소리를 하지? 아웅다웅할 필요도 없는데….”
그가 평소에 강조해 온 일종의 팀워크, 바꿔 말하면 통합이다. 그리고 자신보다 동료들을 앞세우는 마음, 감독과 선수가 서로 상대 입장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배려심이다. 박항서 매직의 요체이자 2020년 ‘혼란의 신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절실한 가치다.
- 베트남 정신도 결국 팀워크인가.
- “감독은 선수 입장에서, 선수는 감독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면 잘못될 게 없다. 원팀을 만들려면 나보다 우리가 우선이란 원칙이 확고하게 잡혀야 한다. 그 원칙이 살아 있는 속에서 자율이 주어진다. 책임과 의무를 본인들이 느껴야 한다.”
- 멋있게 이기는 것보다 잘 지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도 했다.
- “우승 한 번 하고 나면 많은 사람이 몰려와 칭찬해 주는데, 그런 것에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한다. 인기라는 거, 명예라는 건 어느날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진다. (내가) 2002년에도 겪었다. 정말 오랫동안 밤잠 안 자며 준비한 경기도 90분 만에 끝난다. 결과도 나온다. 지난해 스즈키컵에서 우승했다고 온 나라(베트남)가 난리였는데 내년(2020년)에 또 스즈키컵에 나가야 한다. 우승하기 위한 도전이 지나면 지키는 도전이 오는 것이다. 그러니 질 때 잘 져야 한다. 뭘 배울 게 있는지 잘 들여다봐야 한다.”
- 스스로 우승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지 못하면서 선수들에게 우승하라고 주문할 수 없다고 했었다.
- “내가 이기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면 선수들도 절대 못 이긴다. 호주와 눈 오는 날 붙었는데 우리 선수 중엔 태어나서 눈을 처음 본 아이도 많았다. 그럼 우리가 포기해야 하나? 선수들에게 ‘호주 선수들은 키가 큰 대신 무게중심이 높아 눈 오는 날 불리하다. 우리는 작은 대신 중심이 낮아 미끄러운 환경에서 훨씬 유리하다’며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줬다. 장군이 이긴다고 확신을 못하는데 병사들이 싸울 수 있겠나. 공격으로 안 되면 수비로, 정공법으로 안 되면 허를 찔러서라도 이길 방법을 찾아서 선수들에게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
- 나 혼자 모든 걸 잘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는 말도 했는데.
- “모든 팀이 결과물을 내기까지는 각자의 맡은 임무가 있다. 공수(攻守)에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누굴 도울 수 있겠나. 나도 꽤 오래 축구 밥을 먹고 있지만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는 아니다. 내 경험만 믿으면 안 된다. 식단, 운동 방법, 치료, 전술 등 각자의 영역에서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게 감독으로서의 내 역할이다.”
박 감독이 베트남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동남아시아에 ‘축구 지도자 한류’ 바람이 확산하는 분위기다. 박 감독 자신은 지난해 11월 20만 달러(약 2억3000만원) 수준이던 기존 연봉을 대폭 올려 베트남축구협회와 재계약(연봉 12억원 추정)했다. 지난해 12월에는 신태용(50) 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인도네시아 지휘봉을 잡았다. 정해성(62) 호찌민 FC(베트남) 감독을 비롯해 동남아 클럽 축구에 도전하는 지도자들도 늘고 있다. 박 감독은 “절친한 후배이자 동생 (신)태용이가 이웃 나라로 건너온 게 반갑기도 하지만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라며 웃어보인 뒤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겠다. 적이 아니라 파트너로 여기면서 서로를 거울 삼아 함께 발전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