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까지 0%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나타난 때는 외환위기 여파가 한창이었던 1999년(0.8%)과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가 터진 2015년(0.7%) 같은 ‘위기 국면’뿐이었다. 지난해엔 이렇다 할 위기 없이도 오히려 더 낮은 물가가 현실화한 셈이다. 이미 물가 상승률은 2013년 이후 2018년까지 연속 1%대 이하에 그쳐, 한국은행의 물가안정 목표치(2%)를 한 번도 달성하지 못했다. 한국이 1990년대 일본을 ‘잃어버린 20년’에 빠뜨린 디플레이션에 들어갔다는 ‘J(Japanification·일본화)의 공포’가 커지는 배경이다.
한국경제 ‘일본식 디플레’ 가시화
작년 물가상승률 사상 최저 0.4%
성장률 1%대, 수출 1년 넘게 후진
“저물가·저성장 악순환 구조 진입
일본 잃어버린 20년 때보다 빨라”
경제가 하강국면에 접어든 상황에서 다른 자산가격까지 내려가면 소비 위축이 심화하면서 충격이 더 커진다. 소비가 줄면 상인들은 물건값을 내린다. 가계·기업 등은 물가 하락을 예상해 소비와 투자를 미루는 악순환에 빠진다. 한국은행이 물가 상승률 목표치를 높지도, 그렇다고 낮지도 않은 2%대로 제시하고 있는 이유다.
그러나 정부와 한국은행은 저물가가 수요 요인보다 농축수산물·유가 등 공급 요인에서 기인한 만큼 디플레이션에 대해서는 선을 긋고 있다. 실제 지난해에는 석유류(-5.7%)와 농축수산물(-1.7%)이 전체 물가를 각각 -0.26%포인트, -0.13%포인트 끌어내렸다. 2018년에는 각각 6.8%, 3.7% 오른 바 있다. 의류 및 신발(0.1%)도 관련 통계 집계 이래 가장 낮은 상승 폭을 기록했는데, 이는 지방자치단체의 무상교복 지원의 영향을 받았다고 통계청은 설명했다. 이두원 통계청 물가동향과장은 “디플레이션은 크게 우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근원물가 상승률의 둔화 속도가 빠르다는 점에서 정부의 진단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근원물가 상승률은 정부가 지난해 0%대 물가의 가장 큰 요인으로 지목된 농산물과 석유류를 제외한 지표다. 기조적인 물가 추이를 나타낸다. 지난해 근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기대비 1분기 1%, 2·3분기 0.7%로 낮아지고 있다.
정부는 부인하지만 민간선 “디플레 진입 … 제조업·R&D에 돈 풀어라”
◆근원물가 상승률도 20년 만에 최저=한국은행은 지난해 근원물가 상승률을 0.7%로 보고 있는데, 이는 1999년(-0.2%) 이후 20년 만에 최저 수준이다. 결국 정부의 설명과 달리 저물가는 수요 부진 탓이 컸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국민 경제 전체 물가수준을 나타내는 지표인 ‘국민총생산(GDP) 디플레이터’ 역시 지난 2001년 이후 처음으로 3분기 연속 하락했다.
성태윤 교수는 “정책 요인이나 농축수산물·석유류 가격 하락만으로는 장기간 이어지는 저물가를 설명하기 힘들다”면서 “사실상 과거 일본처럼 장기 불황에 따른 디플레이션 국면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지난해가 이례적으로 물가상승률이 낮았다면 올해는 기저효과 때문에라도 올라야 하는데, 국내외 기관이 전망하는 올해 물가도 예년과 비교해 크게 오를 기미는 없다.
정부·한국은행은 1%의 상승률을 제시한 반면, 국가미래연구원·한국경제연구원은 0.5% 이하를 예상했다. 정부 기대대로 지난해 물가하락 요인이 사라진다고 해도, 올해 새로운 하락 요인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현재 고3만 대상으로 실시되는 무상교육은 내년부터 고2까지 범위를 넓힌다. 매년 확대되는 건강보험 보장성 역시 물가를 떨어뜨릴 요인으로 꼽힌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의 고령화나 물가 상승률 둔화, 경기 위축 속도를 감안할 때 저물가·저성장 구조로의 진입이 일본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짚었다. 김 교수는 이어 “정부가 돈을 푼다고는 하지만, 복지 정책의 확대는 소비와 연결되지 않는 측면이 많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라며 “수요 부진이라는 저물가의 원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을 견인할 제조업·연구개발(R&D) 등에 재정을 투입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조언했다.
손해용 경제에디터 sohn.y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