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적으로 들리는가. 전직 입법부 수장이라는 체면을 던지고 선택한 자리인 만큼 인상적인 행보를 보여달라는 이야기다.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어느 곳이든 적극 나서야 한다”는 정세균 총리 후보자의 소신을 글자 그대로 믿고 싶다. 물론 우리 권력 구조에서 총리 위상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도전이다. 대통령이 총리들에게 약속했던 ‘분권형’ ‘책임형’이라는 수식어는 거의 언제나 부도 수표가 됐다. MB 시절 경제 장관을 지냈던 한 인사는 “공직 생활 내내 총리라는 자리는 (왜 있는지) 항상 의문이었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산자부 장관 때 보인 원전 긍정론
정권 이미지용 총리 벗어나려면
탈원전 아성 깨기에서 시작하길
그가 장관으로 일했던 노무현 정부는 적어도 원전 문제에서는 문재인 정부와 차이 난다. 차세대 원전 APR+ 기술의 개발은 노무현 정부 때 시작됐다. 전원이 끊겨도 3일간 버틸 수 있고, 10만년 당 1회라는 노심 용융 사고 확률을 100만년 당 1회 미만으로 낮춘 기술이다. 원래대로라면 2027년쯤 준공될 천지 1·2호기, 대진 1·2호기에 적용될 예정이었지만, 현 정부 들어 없던 일이 돼버렸다. 산자부 장관 정세균은 노 대통령과 함께 원전산업 수출을 위해 발로 뛰었다. MB 정부가 UAE 원전 수출을 성사시키자 정세균은 야당 대표이면서도 “획기적인 쾌거”라며 환영했다. 그랬던 그가 지금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한국 원전 산업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원전만큼 문재인 정부의 맹목적인 지향을 드러내는 영역도 드물다. 가장 실용적으로 접근해야 할 에너지 문제가 이념의 표지가 돼 버렸다. 비과학적 공포에 근거한 급진 환경주의자들의 반원전 프레임에 포획돼 수렁에 빠졌다. 환경 문제로 법석을 떨면서도 탄소 및 미세먼지 배출 ‘0’에 가까운 원전은 금기어로 묶여 버렸다. EU와 UN에서도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서는 원전이 불가피하다는 마당이다. 그런데도 ‘탈원전’은 걸핏하면 ‘촛불 정신’을 들고나오는 핵심 지지층에 둘러싸여 한치도 허물 수 없는 아성이 돼버렸다.
꽉 막힌 상황이 정세균에겐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 그의 실용성과 합리성이 돋보이는 무대가 될 수 있다. 이념이 과학을 짓누르는 정권의 도그마를 깬다면 그의 도전은 성공이다. 여건이 나쁘지만은 않다. 문 대통령은 그를 지명하며 미안함을 표시했다. 대통령의 빚은 그에겐 자산이다. 그 자산을 잘 활용한다면 더 큰 꿈을 꿀 기회가 열릴지 모른다. 그 과정에서 청와대와 정권 지지층에 얼굴을 붉혀야 할 수도 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미소를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저 ‘미스터 스마일’로만 머물면 다음 길은 없다.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