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연석 항공우주연구원 전 원장
“지금껏 복원된 거북선은 엉터리”
조선시대 첨단 무기 복원에 몰두
초등시절 미·소 경쟁 보고 꿈 키워
미 영화 ‘옥토버스카이’의 한국판
진천뢰는 1635년 편찬된 화약무기 전문서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에 ‘진천뢰는 대완구(大碗口)로 발사했고, 비격진천뢰는 중완구를 이용했다’는 문구로 등장한다. 대략적인 제원도 ‘진천뢰의 무게는 117근2냥(70.2㎏)…화약은 5근(3㎏), 능철(마름쇠)은 30개를 넣는다’는 설명으로 나온다. 채 전 원장은 “비격진천뢰 유물은 많이 발견됐지만, 진천뢰나 진천뢰를 발사한 대완구 유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며 “역사 속 기록물을 토대로 조선이 독자개발한 진천뢰의 성능을 확인한 첫 연구”라고 의의를 밝혔다.
그의 다음 프로젝트는 거북선의 완벽한 실물 복원이다. 지금까지 복원된 여러 거북선은 겉모습에만 치우쳤을 뿐,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해군 무기체계를 재현하지는 못한 엉터리였다는 게 그의 평가다. 그는 "그동안 복원된 거북선들은 함포를 발사할 수 없는 단지 물에 뜨는 실물 모형이었을 뿐”이라며 "내년 봄 경기도 파주시와 함께 ‘진짜 거북선’을 임진강에 띄울 예정”이라고 말했다.
채 전 원장은 ‘신에게는 아직 열두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라고 말한 이순신 장군에게는 뛰어난 전술 외에도 거북선에 대한 막강한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고 말한다. 그가 분석한 거북선은 당대 최고의 무적함대였다. 왜 수군 깊숙이 거북선이 들어가 앞과 옆·뒤의 화포 19문을 동시에 발사하면 조총과 활·칼로만 무장한 왜군의 배는 대항조차 못하고 수장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채 전 원장이 지금까지 고서 연구를 통해 복원한 조선시대 무기는 총 50종에 이른다.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에 가면 신기전과 각종 총통 등 그가 평생을 쏟아 복원한 옛 무기들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조선의 강토는 그렇게 뛰어난 무기를 가지고도 왜 그렇게 왜군에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했을까. 동래성을 함락한 왜군은 8일 만에 한양에 무혈입성했다. 하루 30㎞의 진격 속도였다. 임금 선조는 경복궁을 버리고 신하들과 의주로 달아났다. 백성은 한양을 버린 임금에 분노해 궁궐에 불을 질렀다. 채 전 원장은 "동래성에서 천자포만 제대로 활용했으면 왜군이 부산을 넘어서지도 못했을 것”이라며 "당시에도 뛰어난 무기생산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언제든 쓸 수 있는 무기로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왜군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조선 수군(水軍)은 달랐다. 1555년 조총으로 무장한 왜구가 쳐들어와 전남 완도가 쑥대밭이 된 적이 있었다. 이후 정걸 장군(1514~1597)이 이끄는 수군이 화포와 전함을 대폭 정비한다. 이어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에 취임, 정걸 장군의 본을 받아 거북선을 건조하고 당대 최고 수군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채 전 원장은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든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라며 "당시 조선의 정치는 전국적인 국방체계를 갖출 수 없을 만큼 나태해 있었다”고 말했다.
정부 출연연의 로켓 과학자가 왜 옛 전통무기 복원에 힘을 쏟고 있을까. 그는 미국 성장영화 ‘옥토버스카이’(1999)의 한국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이력을 지녔다. 영화 속 주인공은 1950년대 미국 탄광촌에 살던 한 소년이다. 소련의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의 발사성공에 대한 뉴스를 듣고 로켓 과학기술자의 꿈을 키운다. 탄광에서 일하던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로켓을 개발하다 산불 누명을 쓰기도 했지만, 연구를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미국 과학경진대회 우승과 대학 입학의 꿈까지 이뤄낸다. 이 영화는 미국 항공우주연구원(NASA)의 엔지니어 호머 히컴의 실제 학생 시절을 그린 작품이기도 하다.
채 전 원장이 로켓 개발의 꿈을 키운 것도 옥토버스카이의 시절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60년대 초 초등학교 4학년 시절 학교 게시판에 걸려있던 외신이 그의 마음에 로켓의 씨를 뿌렸다. 미국과 소련이 우주로켓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소년은 그때부터 도서관에서 로켓과 관련한 책은 모두 찾아 읽었다. 고교 1년 땐 운동장에서 화약을 이용해 로켓 실험을 하다 폭발사고가 나 고막을 다치기도 했다. 하지만 소년은 옥토버스카이의 주인공처럼 포기하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에서는 조선왕조실록 속 신기전이 로켓이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고서적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의 꿈은 과거와 미래로 동시에 뻗어나갔다. 경희대 물리학과 학부와 기계공학 석사에 이어 미시시피주립대 항공우주공학과 석·박사 과정을 거친 것은 그런 그의 세밀한 인생설계였다. 물리학으로 기초를 쌓고, 기계공학으로 엔지니어링을 익힌 뒤 본격적으로 우주로켓 개발에 뛰어들겠다는 계산이었다. 1987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이듬해 항공우주연구원에 입사해 우주로켓 개발자로서 본격적인 경력을 쌓았다.
채 전 원장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건강이 허락하는 한 우리 선조의 뛰어났던 국방과학 무기를 세상에 알리는데 여생을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채연석 전 원장은…
출생: 1951년 충북 충주
학력: 경희대 물리학사-기계공학 석사,
미시시피주립대 항공우주공학 석·박사
경력: 1988년 한국항공우주연구소 입사
1990년 한국항공우주연구소 과학로켓개발사업단장
2002~2005년 6대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원장
2013년~ 과학기술연합대학원 대학교(UST) 교수
2017년~ 국토교통부 항공·철도사고 조사위원회 위원장
학력: 경희대 물리학사-기계공학 석사,
미시시피주립대 항공우주공학 석·박사
경력: 1988년 한국항공우주연구소 입사
1990년 한국항공우주연구소 과학로켓개발사업단장
2002~2005년 6대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원장
2013년~ 과학기술연합대학원 대학교(UST) 교수
2017년~ 국토교통부 항공·철도사고 조사위원회 위원장
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