싼맛에 인조모피 입는다고? 英여왕도 선택하는 ‘진짜’ 가짜

중앙일보

입력 2019.12.10 05:03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윤리적 소비의 확산으로 리얼 퍼(real fur‧모피)보다 페이크 퍼(fake fur‧인조 모피)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이젠 어떤 페이크 퍼를 살 것인가의 문제다.  
 

인조 모피의 신분 상승

앞으로 동물의 털로 만든 옷을 입지 않겠다는 계획을 밝힌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사진 AFP=연합뉴스]

 
지난 11월 5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앞으로 인조 모피를 사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혀 화제가 됐다. 일간지 텔레그래프 등 영국 언론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여왕은 오랜 의상 담당자인 안젤라 켈리가 최근 출간한 서적 『동전의 뒷면:여왕』을 통해 '동물의 털로 만든 옷을 입지 않기로 했다'는 계획을 공개했다고 한다.  

동물 보호 세계적 트렌드 힘입어
저가부터 명품까지, 인조 모피 인기
대놓고 ‘나는 가짜’ 표시 붙이기도
플라스틱 원사 이용, 환경엔 부담

영국 여왕도 선택할 만큼 인조 모피는 완벽하게 신분이 상승됐다. 진짜보다 더 대접받는 가짜가 된 셈이다. 인조 모피가 주목받으면서 '고급스러운 천연 모피' '저렴한 인조 모피'라는 이분법도 더는 통하지 않게 됐다. 다양한 컬러, 독특한 디자인 등 형태가 다양해진 것은 물론 고가의 인조 모피까지 등장했다.  
 
20~30대 여성들이 많이 찾는 온라인 패션 편집숍 ‘W컨셉’에 따르면 인조 모피 외투 매출이 지난해 동기 대비 약 40% 신장했다. W컨셉 마케팅팀 김효선 이사는 “천연 모피보다 합리적인 가격대, 다양한 스타일이 출시돼 일상에서 활용하기 쉬워졌고, 소재와 품질도 천연 모피에 뒤지지 않을 만큼 고급스러워진 것이 이유”라고 했다.  
 

독특한 디자인과 컬러로 인기를 얻고 있는 페이크 퍼 재킷. [사진 W컨셉]

 
인조 모피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스펙트럼도 넓어졌다. 저렴한 동대문표 브랜드부터 백화점 브랜드, 심지어 구찌·겐조·프라다 등 ‘퍼 프리(fur free·모피 반대)’를 선언한 명품 브랜드까지 선택지가 다양해졌다. 싼 맛에 입었던 인조 모피가 고급화된 셈이다.  


명품 브랜드의 잇단 모피 반대 선언으로 '고가 천연 모피''저가 인조 모피'라는 이분법도 더는 통하지 않게 됐다. [사진 드리스 반 노튼]

 
인조 모피 브랜드 ‘원더스타일’의 곽영아 대표는 “초반에는 화려한 색이나 독특한 디자인으로 다소 튀는 스타일의 인조 모피 제품을 만들었다면 요즘은 편안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인조 모피를 개발한다”고 했다. 인조 모피가 시장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서는 굳이 인조 모피처럼 보이는 튀는 컬러, 독특한 디자인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고가의 고급스러운 인조 모피를 찾는 소비자들도 생겨났다. 실제로 원더스타일의 인조 모피 롱코트는 50~70만 원대까지 출시된다.
  

인조 모피 수요가 늘면서 저가부터 고가까지 스펙트럼도 다양해졌다. 인조 모피 특유의 튀는 컬러와 디자인 대신 편안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을 택하는 인조 모피 제품도 많다. [사진 원더스타일, 리스]

 

‘나는 가짜다’,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인조 모피의 인기에는 윤리적 소비에 익숙한 젊은 소비자들이 한몫했다. 이들은 윤리적 소비를 과시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른바 ‘클래시 페이크(classy fake)’ 현상이다. 고급(classy)과 가짜(fake)를 붙여 만든 합성어로 진짜를 넘어서는 멋진 가짜 상품을 기꺼이 소비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퍼 프리 퍼(모피 아닌 모피)'라는 문구를 옷에 크게 적어 넣은 스텔라 매카트니. [사진 스텔라 매카트니]

 
지속가능한 패션을 선도적으로 선보이고 있는 패션 브랜드 ‘스텔라 매카트니’는 인조 퍼 재킷 위에 아예 ‘fur free fur(모피 아닌 모피)’라고 문구를 적어 넣었다. 행여나 진짜처럼 오해할까 소매와 등쪽에 문구가 적힌 흰색 패치를 달아 눈에 띄게 했다. 친환경 패션 제품을 소개하는 온라인 편집숍 ‘투포투마켓’에서는 가방 앞면에 ‘아이 워즈 플라스틱 백(I was plastic bag·나는 플라스틱이었어요)’ 문구를 새긴 제품을 냈다. 재활용 원사를 50% 이상 함유한 에코 플리스 소재로 만든 페이크 퍼 가방이다.
 

'저는 원래 플라스틱이었어요.' 라는 문구를 적어 넣은 에코 퍼 가방. 재활용 원사를 사용했다. [사진 투포투마켓]

 
대중의 시선을 받는 연예인들은 모피 옷을 입었을 때는 해시태그(#)로 인조 모피임을 밝히고 있다. 지난 겨울 배우 이민정씨는 인스타그램에 퍼 재킷을 입은 사진을 올리고 ‘추워서 사 입은 페이크 퍼’라는 글을 게재했다. 연예인 담당 스타일리스트들은 겨울에 스타들에게 모피가 들어간 옷을 입혀야 할 때는 어떤 경우에도 인조 모피를 선택한다. 천연 모피를 입은 것이 알려지면 동물 보호 단체들은 물론 일반인에게까지 싸늘한 시선을 받기 때문이다.  
 
 

자연분해 안되는 소재…환경엔 부담

이처럼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인조 모피의 품질이 좋아졌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지나치게 진짜 같은 인조 모피도 소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사람들에게 천연 모피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킨다는 측면에서다. 동물보호단체 페타(PETA)에서는 옷이나 가방 등에 달아 인조 모피임을 드러낼 수 있도록 ‘FUR IS DEAD(모피는 죽었다)’라는 문구의 열쇠고리를 판매하고 있다.  
 

입은 모피가 인조임을 알리는 동물 보호 단체 '페타'의 열쇠고리. [사진 페타 홈페이지]

 
인조 모피가 활성화되면서 환경적 영향을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동물을 해치진 않지만 결국 플라스틱 원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생산과 폐기 과정에서 환경에 부담을 준다는 얘기다. 그래서 요즘은 인조 모피도 환경적 부담을 최소화한 제품이 주목받는다. 패션 브랜드 ‘파타고니아’가 대표적이다. 1993년 이후부터 폐플라스틱 병, 자투리 원단, 헌 옷 등을 모아 만든 재생 폴리에스터로 양털 재킷을 모사한 플리스 재킷을 만들고 있다.
 

파타고니아의 재활용 플리스 재킷. [사진 파타코니아]

 
서울디자인재단의 지속가능 윤리적 패션 허브 사무국 김인혜 국장은 “인조 모피도 염색 및 가공 과정에서 인공 원료나 화학 약품을 사용하고, 폐기됐을 때 쉽게 분해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친환경적이지는 않다”며 “재활용 소재를 사용하거나 해조류 등 생분해되는 신소재를 활용한 인조 모피를 개발하는 등 현업에서 보다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요즘엔 가짜 털이라는 뜻의 ‘페이크 퍼(fake fur)’ 대신 친환경적인 의미를 부여한 ‘에코 퍼(eco fur)’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브랜드가 많다. 하지만 말 뿐인 에코 퍼가 실제 환경에 친절할지는 의문이다. 동물 보호와 환경 보호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더 똑똑한 패션의 등장이 필요한 이유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