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서 1억2000만원을 신용대출로 빌린다. 상품설명서와 기본약관 자료를 보며 은행원의 설명을 5분간 듣고, 이후 18분 동안 자료를 다시 읽는다. 그리고 대출상품에 대한 이해력 시험을 본다. 평균 점수는 몇점이나 나올까.
8일 금융연구원은 ‘가계대출 안내방식 개선을 위한 연구: 핵심상품설명서를 중심으로’ 보고서를 통해 지난 5월 한 대학교에서 학생 159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를 소개했다. 실험은 만기 3년인 가상의 신용대출 상품을 만들어, 실제 은행 대출계 직원의 설명 내용을 녹음한 것을 들려주는 식으로 이뤄졌다. 일반적으로 대출상품에 가입할 때 창구에서 15분 정도 걸린다는 점을 고려해 실험을 설계했다.
그 결과 전체 학생의 평균 점수는 62.7점에 그쳤다. 간신히 낙제를 면한 수준이다. 이는 지난 1월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우리 국민의 금융이해력 점수(평균 62.2점)와 비슷한 수준이다(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64.9점). 그런데 이번 실험에서 평균 점수보다 중요한 건 그룹별 점수 차이다.
무용지물 핵심상품설명서
그룹 B는 A보다 2점 높은 60점을 받았다. 상품설명서와 기본약관에 추가로 1쪽짜리 핵심상품설명서를 받은 경우다. 핵심상품설명서는 소비자의 이해도 제고 차원에서 2007년 도입됐다가 2015년 서류 간소화를 이유로 폐지됐다. 이후 올해 1월에 다시 가계대출에 핵심상품설명서가 추가됐다. 따라서 현재 은행 대출을 받는 사람들이 그룹 B와 같은 수준의 정보를 받고 있다.
하지만 핵심상품설명서를 받지 않은 A그룹과 점수 차이가 2점에 불과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핵심상품설명서는 이해도를 높이는데 별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유는 그 형식 때문이다. 핵심상품설명서는 중요한 내용을 질의응답 형식으로 정리했는데, 대부분의 답이 ‘상품설명서를 확인하라’이다. 상당히 불친절하다. 항목마다 상품설명서를 다시 찾아봐야 하는 추가적인 노력을 들여야 하는데, 실제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란 쉽지 않다.
그림·도표로 요약하자 이해도 쑥
서병호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문장 위주 설명은 금융소비자가 처음부터 읽지 않는 경향이 있다”며 “가계대출의 핵심상품설명서나 보험상품의 상품요약서를 그림·도표·키워드 중심으로 대폭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스마트폰, 태블릿 같은 작은 화면으로 자료를 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림과 도표 위주로 구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