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에콰도르·볼리비아·베네수엘라·페루·온두라스·콜롬비아에서 성난 시민들이 냄비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 이들이 냄비를 집어 든 이유는 각기 다르지만, 냄비를 두드리며 내는 소리는 같다. 무능한 정치권이 경제를 망가뜨린 데 대한 분노의 소리다. 텅 빈 냄비처럼 시위대의 배도 텅 비었다는 아우성이다.
냄비는 서민 생활고 상징하는 도구
1980년대 잃어버린 10년 닮은꼴
“이념 필요없어, 민생 해결부터”
부채의 늪에 성장률 하락까지
글로벌 금융위기 뇌관 될까 우려
전문가들은 현재 중남미 상황이 1980년대 부채 위기 이후 지역경제를 마비시킨 ‘잃어버린 10년’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오일 쇼크 이후 원자재 가격 하락 등으로 대부분의 국가가 경제위기를 겪었던 1980년대에 이어 중남미가 두 번째 ‘잃어버린 10년’에 직면했다”고 전했다.
복지 남발에 저주로 돌아온 ‘자원의 축복’
하지만 최근 중남미 반정부 시위는 이데올로기와 관계없다는 게 국제사회의 평가다. 우파가 집권한 칠레·에콰도르·온두라스뿐 아니라 좌파 정권의 볼리비아·베네수엘라 등 정치색과 관계없이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좌파든 우파든 모르겠고, 당장 배고픈 민생이나 해결하라’고 각국 시위대는 외치고 있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2000년대 초반 원자재 호황 속에 늘어난 중산층, 그리고 그 호황의 과실조차 함께 누리지 못한 빈곤층의 불만이 최근 경기 침체와 맞물리며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했다”고 분석했다.
중남미 경제가 어려워진 배경에는 자원 수출에 의존하는 취약한 경제 구조가 있다. 세계 경제가 호황일 때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중남미 경제도 성장하지만, 반대의 경우 직격탄을 맞는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중남미 성장률은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나들던 2010~2013년 연 3~5%를 기록했지만, 2016년에는 마이너스(-) 0.4%까지 떨어졌다. IMF는 올해도 중남미 지역 경제성장률이 0.2%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했다.
FT는 “지난 20년간 좌파 지도자들이 소득 재분배를 위해 많은 돈을 썼지만, 정작 경제구조 개선을 위한 충분한 인프라나 교육 분야에는 전혀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형적인 ‘자원의 저주’를 겪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에 민심 폭발
칠레가 대표적이다. 세계 최대 구리 생산국인 칠레는 2000년대 가파르게 성장했다. 201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고, 수도 산티아고는 중남미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됐다. 그러나 구릿값 하락과 함께 성장률은 2017년 마이너스(-)로 전환했고, 재정이 고갈된 정부가 지하철 요금 4%(약 50원)를 인상하자 서민들이 분노한 것이다.
칠레 국립통계연구소에 따르면, 칠레에서 월 소득이 550달러(약 64만원) 이하인 노동자는 절반을 넘는다. 산티아고 주민 상당수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하루 최대 2시간 이상을 출퇴근하며, 매달 소득의 20%가량을 교통비에 쓴다. 공공요금 인상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골드만삭스의 중남미 담당 이코노미스트 알베르토 라모스는 “최근 시위의 주된 원인은 경기 침체로 수면 위로 드러난 뿌리 깊은 경제 불평등”이라며 “중남미 경제는 지난 6년간 평균 0.8%로 저성장을 겪으며 정부 부채가 쌓였고, 더는 서민 복지를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민심이 폭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브라질·콜롬비아·칠레 통화 역대 최저치
올 들어 지난 3일까지 아르헨티나 페소는 37%(달러 대비), 칠레 페소가 15%, 브라질 헤알이 9%, 콜롬비아 페소가 8% 하락했다. 심지어 브라질에서는 아직 시위가 발생하지도 않았는데도 시위 가능성에 대한 우려로 통화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고 블룸버그는 분석했다.
일부 전문가는 이번 중남미 시위가 글로벌 경제의 뇌관을 터트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금융 위기 권위자 카르멘 라인하트 하버드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이미 부채에 허덕이는 중남미 경제에 화폐 가치가 더욱 떨어지는 현상이 지속될 경우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촉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문제는 중남미가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할 경우 선진국에 위기가 전이될 수 있다는 점이다. 라인하트 교수에 따르면, 유럽 일부 은행은 중남미에 이미 많은 대출을 해준 상태다. 라인하트 교수는 “현재 글로벌 금융 건전성은 중남미를 포함한 신흥국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
실제로 지금 중남미 경제 상황은 1980년대와 닮았다. 1970년대 고유가에 힘입어 연평균 4.1%의 성장을 기록한 중남미 국가들은 당시 저금리 기조 속 해외 은행들에 막대한 자금을 손쉽게 빌릴 수 있었고, 대부분의 자금을 복지 지출에 사용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 미국이 물가를 잡겠다며 금리를 19%까지 올리면서 중남미는 부채 상환 능력을 상실했고, 1982년 멕시코가 디폴트를 선언, 다른 국가들도 그 뒤를 이으며 위기가 발발했다.
만약 반정부 시위가 거세질 경우 각국 정부는 부채를 늘려가며 복지를 다시 확대할 가능성이 크다. 시위대를 달래기 위해 칠레는 지하철 요금 인상안을 철회한 데다 연금과 최저임금 인상안까지 내놨다. 아르헨티나 신임 대통령 알베르토 페르난데스는 복지 정책 강화를 공약했다. 미 정치학자 제임스 보즈워스는 “내년 시위대는 더욱 폭력적으로 나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FT는 “시위대가 불평등에 분노하며 긴축정책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 중남미 정부가 부채를 줄이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전했다.
배정원 기자 bae.jungw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