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선2035

[시선2035] 당신은 ○○을 신뢰하나요

중앙일보

입력 2019.12.04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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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영 정치팀 기자

영국 싱크탱크 레가툼 연구소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 번영 지수’는 흔히 ‘살기 좋은 국가’ 지표로 인용된다. 북유럽 국가들이 상위권을 휩쓴다는 그 발표다. 2007년 조사 이래 우리나라는 매번 20~30위대를 유지했다.
 
지난주 발표된 2019년 보고서에서도 우리나라는 전체 167개국 중 29위. 12개 세부 지표별로 살펴보니 교육(2위), 보건(4위)은 최정상급이고, 경제의 질(10위)도 높다. 그런데 ‘사회적 자본’이 142위다. 구소련 일원이었던 리투아니아(141위), 벨라루스(143위)가 위아래다. 사회적 자본은 사회 구성원 간 신뢰도가 생산 활동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로, 미국의 석학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주창한 ‘신뢰 자본’과 유사한 개념이다.
 
과거 자료를 모두 살펴봤다. 전년도(78위)와 비교하면 무려 64계단 주저앉았다. 그 이전엔 최고 51위(2012년)를 비롯해 대부분 50~60위대였다. 2016년 탄핵 정국 때만 이례적으로 낮았을 뿐(105위)인데, 지금이 더 낮다. 연구소가 사회적 자본을 평가하는 설문을 찾아봤다. "사람들이 당신을 존중하며 대했나요”"문제가 생긴 당신을 도와줄 믿을 만한 친구가 있나요” "당신 지역의 경찰을 신뢰하나요” 등.
 
요 몇 년 새 그랬다. 정치권은 존중이 아닌, ‘한 줌’ ‘궤멸 집단’ 등 저주의 수사를 보였다. 시민은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두 동강 났다. 믿음의 대상은 오로지 피아(彼我)로만 구분됐다. 선거를 앞둔 광역자치단체장 후보자를 수사하던 한 지역 경찰은 “평생 경찰 할 것도 아니고 이 건만 잘되면 나도 한몫 잡을 수 있다”고 떠들다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그러고 보니 연구소의 순위표는 그저 현상을 숫자로 풀이한 것일 터. 나만 정의라는 아집과, 내 편이 아니면 죽창을 들라는 편집(偏執)이 아른거린다. “2017년 5월 10일 이날은 진정한 국민 통합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던 대통령 취임사에 비춰보면 그저 씁쓸할 뿐. 20여년 전 후쿠야마는 “신뢰 기반이 없는 나라는 사회적 비용 증가로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 것”이라고 했다.
 
김준영 정치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