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인데 민망, 뇌 하얘진다"···대학 선거 춤 유세 '찬밥'

중앙일보

입력 2019.11.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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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한 후보의 선거본부원들이 홍보를 하고 있다. 신혜연 기자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 나야 나, 기호 1번 000, 뽑아줘요 000"  

25일 저녁 6시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경영관 앞에는 때아닌 '작은 콘서트'가 열렸다. 워너원 등 인기 가수들의 최신곡을 개사한 노래에 맞춰 10여 명의 학생이 집단 안무를 췄다. 이들은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총학생회장 선거에 참여한 선거운동본부(선본) 구성원들이다. 정후보, 부후보는 까만 양복에 구두까지 맞춰 신고 정중앙서 율동을 이끌었다. 영하 2도의 날씨에 격한 안무를 소화하다 보니 선본원들의 입에선 끊임없이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열정적인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은 거의 없었다. 학생들은 고개를 숙이고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빠르게 길을 지나쳐갔다. 눈길을 주는 사람도 드물었다. 이 학교 사학과에 다니는 이모(23)씨도 선본원들 앞을 바삐 지나는 학생 중 한명이었다. 이씨는 "춤 유세가 후보들 얼굴을 알리는 역할은 하겠지만, 역시 공약이 중요한 거 같다. 저것(춤 유세)때문에 투표를 안 할 사람이 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의 무대는 이후로도 15분간 계속됐다.  
 
13일 이 대학 학내 커뮤니티에는 "도대체 왜 학생회장 선거할 때마다 춤을 추는 거냐. 기성정치에서 이상한 것만 배워왔다"는 글이 올라왔다. 해당 글에는 "선본원들도 민망해 보인다. 2019년에 좀 안 어울리긴 한다" "친구들이 다들 춤 보기 싫다고 한다. 부끄럽고 민망해서" 등의 동조 댓글이 달렸다. 소음 피해를 호소하는 댓글도 있었다. 22일에는 "선본원님들 제발 수업시간에 조용히 좀 해달라. 발표하는데 경영관 앞에서 선본원이 구호를 외치는 바람에 뇌가 하얘졌다"는 글이 올라왔다.  


 

“상대 선본도 추는데 우리만 안 출 수 없어” 

선거를 준비하는 입장에서도 율동 유세는 고민거리다. 2년 전 성균관대 학내 선거에 선본원으로 참여한 경험이 있다는 이모(22)는 "날이 추운데 후보는 정장을 차려입고 선본원들은 얇은 선본 후드집업만 입고 있어야 한다. 핫팩을 쥐여 주긴 했는데 워낙 추워서 율동을 시키는 입장에서도 마음이 안 좋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고려대학교 학내 선거에서 선본원으로 활동해 본 경험이 있다는 15학번 김모(24)씨도 “춤을 잘 못 춰서 힘들었다. 친구들이 보면 부끄럽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김씨는 대학가에서 춤 유세가 사라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하기 싫은 일을 강제하는 것이 전반적으로 없어지는 분위기라 그런 것 같다. 우리 학교는 여전히 율동 유세가 대세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흐름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한 표가 아쉬운 입장에서 춤 유세를 쉽게 없애지는 못하는 게 현실이다. 4년 전 총여학생회 선본에서 활동했다는 연세대 14학번 정모(25)씨는 "춤을 추면 사람들이 그래도 한 번 돌아보는 게 있다. 요즘은 학생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이 떨어지다 보니 작은 관심도 소중하다. 선본원들끼리 평소에도 선거 티를 입고 다니자고 약속할 정도로 필사적"이라고 설명했다. 

성균관대 선본에 참여했던 이씨 역시 "선거운동 세칙상 선본이 할 수 있는 홍보가 제한적이다. 선본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걸 다 하는 편이 유리하다. 아예 선거 세칙에서 춤 유세를 없애는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율동 유세는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본다"고 말했다.
 

오프라인 홍보 효과 적어…SNS로 옮겨 유세  

그러나 적지 않은 학생들은 율동 유세가 학생들의 관심을 끄는데 효과적이지 않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화여대 13학번 변모(26)씨는 “유세에 사용되는 노래나 춤이 비슷비슷해서 별로 시선을 끄는 부분이 없다. 기존의 방법을 따라 하는 것보단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는 게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선거운동에서 춤 유세를 거의 하지 않는 대학도 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에서도 경영대는 2년 전부터 춤 유세를 하지 않고 있다. 올해 경영대 학생회장 후보로 나온 한모(22)씨는 "율동 준비에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고 다들 너무 힘들 수도 있으니 안 하기로 했다. 작년에도 출마 선본들 합의하에 율동 유세는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한씨는 "학우들로부터 소음에 대한 컴플레인이 매년 들어오는 것도 고려했다"고 말했다.  
 
선거운동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대체하는 흐름도 보인다. 서울대학교 37대 인문대학 학생회장에 새로 선출된 신귀혜(21)씨는 "입학 이후 학내에서 춤 율동 유세를 하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며 "학우들 관심을 잡기 위해서라면 춤을 추기보다는 온라인에 영상을 올릴 것 같다. 작년부터 각 선본 마다 SNS 계정에 노래를 개사하거나 쇼프로그램을 패러디하는 등 개성 있는 영상을 올려 호응을 받는 걸 자주 봤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학내 선거에 출마한 한 선본의 SNS 동영상 홍보물. 선본 이름을 넣어 유튜브 채널 '워크맨'을 패러디한 '00맨'을 만들었다. [인스타그램 캡처]

 
이런 변화가 대학 내 개인주의 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해석도 있다. 2년 전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 선본원으로 참여했다는 이모(25)씨는 "개인주의가 강해진 상황에서 총학생회는 어떤 가치를 내세우는 곳이 아니라 서비스 기관에 가까워졌다"며 "학우들이 불편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선거운동이 진행되다 보니 요란한 춤 유세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신혜연 기자 shin.hyeye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