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03>
양융의 회고록에 이런 구절이 있다. “지원군 사단장들에게 주석의 지시를 전달했다. 김일성이 나를 찾으면 나는 너희들을 찾겠다고 하자 다들 알아듣는 눈치였다. 평양은 성한 곳이 없었다. 비행기에서 보면 포탄 투하로 생긴 구덩이가 물고기 비늘 같았다. 지원군은 평양 재건(重建)을 구호로 내걸었다. 전쟁 흔적 지우기에 진력했다. 널려있는 불발탄을 수거해서 폭파했다. 구덩이를 메우고 파괴된 가옥은 새로 지었다. 자재는 국내에서 실어 날랐다. 조선의 일초일목도 건드리지 않았다.”
김일성 ‘8월 종파 사건’에 중국 불신
북, 소련과 밀착…중국은 원조 거절
친중 연안파는 중국 망명 타진
김일 경제대표단 베이징 선제 방문
중국군 참전 기념식 계기로 훈풍
평양 중건은 1956년 봄까지 3년이 걸렸다. 북한의 국방부 건물도 그때 지었다. 그해 여름, 친중파(연안파)가 주도한 ‘8월 종파’ 사건이 터지자 김일성은 중국을 불신했다. 비망록을 중국 측에 전달했다. “조선 문제 해결을 위해 유엔에 협조를 요청하자.”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사회주의 진영에서 탈퇴할 생각이 있다고 판단했다. 소련 대사에게 우려를 쏟아냈다. “김일성은 지원군이 철수하기를 바란다. 티토의 길을 걸을 가능성이 있다. 나치의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며 소련의 의견을 구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에게도 지시했다. “김일성에게 정부 명의로 답전을 보내라.”
12월 18일, 중국 정부가 북한에 전문을 보냈다. “유엔은 조선전쟁의 한쪽을 담당했다. 사실이 그렇고 법률적으로도 그렇다. 유엔은 남한 정부만 승인했다. 조선 문제 해결에 협조할 자격이 없다. 조선반도 통일은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지원군 전면 철수도 거론했다. “지원군 간부 중에 조선의 법률과 풍속을 위반한 사례가 있었다. 주민들에게 오만하고, 내정에 간섭한 일은 개별 사건이지만, 지원군을 점령군으로 오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계속 주둔할 경우 환영받지 못한다. 1954년 9월과 1955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13개 사단이 조선에서 철수했다. 현재 44만 명이 조선에 주둔 중이다.”
우더는 텐진(天津)대학 교장으로 내정된 상태였다. 제대로 된 답변 못 주고 창춘을 떠났다. 우더의 후임 푸전셩(富振聲·부진성)은 동북항일연군 출신이었다. 북한에 남다른 애정이 있었다. 친중파의 일원이었던 김충식의 처지를 동정했다. 직접 찾아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귀하는 조선노동당 간부였다. 허락 없이 우리나라에 온 것은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행위가 아니다. 귀국하기를 바라지만, 정 원하지 않으면 체류를 허락하겠다.” 경고도 잊지 않았다. “중·조 양국은 우호 관계를 유지해왔다. 형제 당과 형제 국가의 내부 문제에 간섭하기를 원치 않는다. 저우언라이 총리도 중·조 양국은 해결 못 할 일이 없다는 말을 자주한다.” 당 중앙의 당부도 전달했다. “중국에 있는 동안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맘대로 다녀라. 어디건 상관없다. 단, 조선인과 중국 조선족과는 접촉과 통신을 피해라. 조선에 관한 문제는 입에도 올리지 마라.”
‘8월 종파사건’ 전후 북·중 관계는 삐거덕거렸다. 북한이 소련에 기울자 중국은 북한의 무상원조 요청을 거절했다. 북한의 반응은 야멸찼다. 부수상 김일(金一)이 이끄는 경제대표단의 중국방문 계획을 취소해버렸다.
북한 마오쩌둥 아들 묘지 참배 행렬
1957년 10월 25일, 중국지원군 참전 7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평양과 북한 전역이 떠들썩했다. 지원군에게 위문품과 위문편지가 쇄도했다. 마오쩌둥과 김일성도 축하전문을 주고받았다. 중국도 요란했다. 지원군의 거리 청소와 북한 부녀자들의 마오쩌둥 아들 묘지 참배 모습이 연일 인민일보를 장식했다. 연안파 제거로 침체됐던 북·중 관계가 훈풍을 되찾을 징조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