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놓고 9.19 합의 깬 김정은…軍은 北발표 때까지 침묵했다

중앙일보

입력 2019.11.25 18:31

수정 2019.11.2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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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이 서해 완충지역에서 포사격 훈련을 중지하기로 했던 지난해 '9·19 군사합의'를 위반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부전선에 위치한 창린도 방어대를 시찰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5일 이 사진을 보도했다. 촬영 날짜는 밝히지 않았다. [연합뉴스]

북한 조선중앙통신 등은 25일 “(김 위원장이)서부전선에 위치한 창린도 방어대를 시찰했다”며 “(김 위원장이) 해안포중대 2포에 목표를 정해주시며 한 번 사격을 해보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해안포중대 군인들은 평시에 자기들이 훈련하고 련마해온 포사격술을 남김없이 보여 드렸다”고 전했다. 김 위원장 지시에 따라 실제 포 사격이 이뤄졌음을 뜻한다. 북한 매체들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이날 “싸움준비와 전투력 강화가 곧 최대의 애국”이라고 지침을 내렸다. 또 “포병부대, 구분대들에서는 명포수운동의 불길을 계속 지펴올려야 한다”며 “임의의 단위가 임의의 시각에도 전투임무수행에 동원될 수 있게 철저히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김정은 사격 지도 창린도는 포격 금지구역

백령도 남동쪽에 위치한 창린도는 남측 대청도에서 동쪽으로 약 35㎞, 서해 북방한계선에서 10여㎞가량 떨어진 북한의 최전방이다. 9·19 군사합의의 포사격 금지구역에 포함된다. 남북은 지난해 9월 평양 정상회담 당시 군 당국간 남북 군사합의를 체결하면서 육상 군사분계선(MDL)의 남북 일대와, 서해의 135㎞ 구간에서 완충구역을 설정했다. 서해 완충구역은 남측 덕적도 이북에서 북측 남포 인근 초도 이남까지의 수역으로, 남북은 이곳에서 포사격과 해상 기동훈련을 전면 중지했다.  

국방부 “9·19 군사합의 위반, 유감스럽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최근 현지지도했다고 북한이 25일 공개한 창린도. 남북은 지난해 9월 19일 군사분계선(해상 포함) 지역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지 않기로 합의했다. [사진 구글어스 캡처]

최현수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오전 브리핑에서 “오늘 아침 북한 언론매체에서 밝힌 서해 완충 구역 일대에서의 해안포 사격훈련 관련 사항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지난해 9월 남북 군사당국이 합의하고 그간 충실히 이행해 온 9·19 군사합의를 위반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ㆍ북한 접경지역 일대에서의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킬 우려가 있는 모든 군사적 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이러한 유사한 재발하지 않도록 9·19 군사합의를 철저히 준수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9·19 군사합의’서해 완충구역 및 창린도 위치.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군은 9·19 군사합의에 따라 백령도, 연평도 등 서북 도서의 해안포와 함포 포신에 덮개를 설치하고, 포문을 폐쇄했다. 또 서북 도서에 배치된 K-9 자주포, 천무 다연장 로켓, 스파이크 미사일 등을 배에 실어 육지 훈련장으로 옮긴 뒤 포격 훈련을 하고, 이를 다시 배에 실어 서북 도서로 갖고 오고 있다. 그런데 포신을 막아놓아야 하는 곳을 김 위원장이 찾아 실사격 훈련을 지시한 것이다.
 

신종우 한국국방안보포럼 전문연구위원은 사격 훈련에 동원한 북한 무기와 관련 “(북한이 공개한 사진의) 타이어 굵기로 봐 76.2㎜ 해안포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북한 해안포는 북방한계선(NLL)을 겨냥하고 있다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실제로 어느 방향으로 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연평도 포격 도발 9주기 맞춰 무력 시위 나섰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해 전방 여성중대를 찾았다고 북한 매체들이 25일 전했다. [사진 조선중앙통신]

합의서 서명 현장에 있었던 김 위원장이 직접 사격을 지시한 건 합의서를 무시하는 조치이자, 향후 남북간 군사적 긴장 고조를 알리는 예고편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북한은 미국이 비핵화 협상에서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경우 ‘새로운 길’로 갈 수 있다고 위협해 왔는데, ‘새로운 길’에는 한국을 볼모로 삼아 군사적 긴장 수위를 올린 뒤 미국을 압박하는 북한의 전통적 수법이 담겼다는 관측이다. 진희관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북한 최근 소나기 담화를 내놓더니 이젠 ‘행동’으로 옮기는 징후를 보이고 있다”며 “이마저 통하지 않으면 실제 군사적 행동으로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최현수 국방부 대변인 [사진 연합뉴스]

군 당국, 포 사격 알고도 '뒷북 발표' 논란  

국방부는 이날 김 위원장의 포 사격 지시가 언제였는지는 답변하지 않았다. 북한이 발사체를 쏠 때마다 직후 신속하게 ‘1보‘를 내놓았던 기존 행보와 다르다. 단 군 내부적으론 김 위원장의 창린도 방문 및 포 사격훈련 시점을 지난 23일로 파악하고 있다고 한다. 23일은 2010년 11월 23일 북한이 연평도 포격 도발을 벌인 지 9년째 되는 날이다. 김 위원장이 의도적으로 이날을 골라 무력시위를 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소식통은 “24일엔 비가 내렸는데, 공개한 사진에서 땅은 비에 젖은 흔적이 없다”며 “22일 구름 등 기상 상황으로 미뤄볼 때 (훈련이 진행된 날은) 23일이 유력하다”고 말했다. 또 북한은 대체로 김 위원장의 동향을 하루 지나 보도하는 경향이 있지만, 김 위원장이 이번처럼 섬을 방문했을 경우 보안 문제 등을 의식해 이틀 뒤인 25일에 공개했을 가능성도 나온다. 북한 매체는 김 위원장이 “온 하루 전사들과 함께 계셨다”는 표현을 썼다.
이때문에 군 당국이 북한의 포 사격을 파악하고도 북한이 발표할 때까지 이를 함구해 '은폐 의혹' '뒷북 발표' 논란을 자초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전직 군 정보 당국자는 “탈북자 강제송환(7일), 김 위원장 초청 친서 비공개(5일) 등 북한과 관련해 정부가 불투명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의혹을 사고 있는 만큼 북한의 합의 위반 사실을 파악한 즉시 곧바로 이를 공개하고 재발방지를 요구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정용수ㆍ이근평 기자 nkys@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