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임 법원장이었다 하더라도 그러면 단군 할아버지때부터 내려 올 거예요?"(박지원 대안신당 의원)
지난 4일 감사원은 대법원장 공관 리모델링 사업에 든 예산 16억6650만원 중 4억7510만원을 대법원이 임의로 다른 예산에서 끌어와 썼다는 내용의 감사보고서를 발표했다. 5일 국회에서 비판이 나오자 대법원은 "전임 대법원장 시절 결정된 것" 이라는 취지로 해명했다.
‘셀프 공관 공사’는 아니더라도…국가재정법 위반
이후 대법원이 공공기관 입찰시스템인 나라장터에 공관 리모델링 사업 입찰 공고를 올린 시점이 2017년 8월 22일이다. 김 대법원장은 공고가 나기 하루 전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지명됐다. 그리고 한 달 뒤인 9월 26일 취임했으니 김 대법원장이 다른 예산을 끌어와 자신의 공관을 고치라는 지시를 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셈이다.
대법원측 설명에도 남는 의문은 있다. 2017년 게시된 공관 리모델링 사업 입찰 공고에는 사업 예산이 19억9920만원으로 책정돼있다. 기존 국회에서 받은 9억9900만원보다 10억원가량 큰 금액이고 다른 몫에서 무단으로 끌어온 예산을 합한 16억7000만원보다도 3억원 이상 큰 금액이다. 대법원은 “관련 직원들이 모두 바뀌어 당시 정확한 상황을 알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적격심사제 피하기?…예산 사용 적정성도 못 따져
적격심사제는 우선 최저가 낙찰을 하되, 낙찰자가 적격심사기준에 맞는지도 판단해 부실 입찰을 막는 방식이다. 적격심사기준은 기재부 예규에 세세하게 정해져 있다. 또 타일 한장을 교체하더라도 발주처(대법원)에서 ‘예정 가격’을 산출해 항목별 예산 소요 기준을 미리 정해둔다. 추후 예정 가격에 맞게 공사를 시행했는지 등을 토대로 예산 사용의 적절성을 평가한다. 대법원이 법을 제대로 지켰다면 이 방식을 택했어야 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협상에 의한 계약’을 계약 방법으로 공고했다. 협상에 의한 계약은 공사가 아닌 용역이나 물품 계약을 맺을 때 특허나 독자적인 기술이 있는 전문 서비스가 필요한 계약에서 맺는 방법이다. 업체별 기술력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공사계약에는 맞지 않는 방식이다. ‘예정 가격’도 미리 정해놓지 않기 때문에 추후 공관 리모델링에 사용된 예산이 적절했는지 따져볼 만한 기준도 마땅하지 않다.
때문에 대법원이 가격이나 공사 내용에 대한 재량권을 비교적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계약 방법을 택한 것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건설계약부문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한 변호사는 "적격심사제보다 협상에 의한 계약 방식에서 발주처가 업체의 제안서 평가 내용 등을 융통성 있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사실" 이라고 말했다.
대법원이 만든 리모델링 공사 제안서 평가 요소에는 ▶외부 마감재 사용의 적정성 ▶대법원장 공관의 이미지 부여 등이 포함됐다. 실제 공사를 수행한 업체는 석재 공사에 전체 사업비의 절반가량인 8억원을 썼다. 대법원은 "공사뿐 아니라 디자인적 요소도 있어 협상에 의한 계약을 맺었다"고 해명했지만, 감사원은 "대부분이 리모델링 공사였고 실제 계약서에 첨부된 공사원가계산서에도 공사 비용만 포함돼 있어 해당 의견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답했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참여연대 공동대표)는 "예산 사용의 위법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곳이 대법원"이라며 "이런 일이 어느 대법원장 때 발생했냐를 떠나서 대법원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말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