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0월 25일 120만 명 참가로 정점을 찍은 시위는 매일 오후 5시 이곳 이탈리아 광장에서 시작된다. 대통령궁 등 시내 다른 곳으로 시위대가 행진한다. 광장 인근 버스정류장은 천장이 부서졌다. 버스 안내 전광판은 불에 타 뼈대만 남았다. 신호등도 곳곳에서 파손돼 흉물처럼 매달려 있다.
‘APEC 취소’ 칠레 산티아고 르포
“지하철 50원 인상이 문제 아니다
30년 누적 문제, 의료·복지 개혁을”
“서민들 100년 벌어야 5억인데
의원 1년에 8억 써 정부가 도적질”
무정부주의자·원주민 시위대 가세
단일 지도부 없어 방화 등 통제불능
그사이 광장 주변에 경찰 진압차가 속속 배치됐다. 경찰들이 광장 중심을 에워쌌다. 경찰이 경고방송을 한 뒤 곧바로 강제 해산이 시작됐다. 경찰은 최루가스와 최루액을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분사했다. 터지는 최루가스에 놀란 시위 참여자가 연기를 피해 도망쳤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위대는 돌을 집어들어 경찰 차량을 공격했다. 이렇게 곳곳에서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했다.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으로 촉발된 칠레의 대규모 시위는 16일째인 이날도 계속됐다.
칠레는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세계 41위권, 중남미 국가로는 멕시코와 함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다. 남미에선 상대적으로 부국에 속한다. 하지만 소득 불평등 수준은 남아프리카공화국·코스타리카에 이어 OECD 내 세 번째로 높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정권을 종식하고 민주정부가 수립된 지 30년이 됐는데도 빈부 격차와 사회적·경제적 불균형은 오히려 확대됐다.
억만장자 피녜라 대통령 지지율 14%
이탈리아 광장에서 만난 시위대 아리아스 세불베다(32·엔지니어)는 “정부가 도적질하고 있다”고 분노했다.
- 누가 시위를 주도하나.
- “따로 없다. 시위를 주도하는 것은 우리 시민들이다.”
- 무엇에 분노하나.
- “일반 서민은 100년을 벌어 봤자 3억1000만 페소(4억8000여만원) 정도인데 일부 상원의원, 공무원들이 1년에 쓰는 돈이 4억8600만 페소(7억6000여만원)다. 서민이 평생 모은 돈보다 의원들이 1년에 쓰는 돈이 월등히 많다는 거다.”
- 해결 방법이 뭔가.
- “불평등한 삶을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 교통비는 세계 제일로 비싸고 세금은 매순간 인상되고 있다. 정부가 시민을 악용하고 도둑질하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칠레 싱크탱크인 아테나 랩에 따르면 시위대는 크게 세 개 그룹으로 나뉜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소규모로 움직이며 동시다발적으로 지하철역을 공격하는 ‘급진적 무정부주의자’, 혼란을 틈타 상점을 약탈하는 ‘기회주의자’, 또 피켓을 흔들고 구호를 외치거나 냄비 두드리기 등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그룹이다. 아테나 랩은 그러면서 현재까지 3개 그룹 중 어느 그룹에도 눈에 띄는 리더가 없다고 분석했다. 그러다 보니 시위대의 요구가 연금·의료 개혁에서 개헌, 대통령 하야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현지 외교 소식통은 “지도부나 대변하는 세력이 없으니 시위대의 목소리를 모아 하나로 전달하는 기능이 전혀 없다. 시위대가 원하는 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정부가 누구하고 어떻게 협상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다”고 말했다. 야당은 ‘근본적인 대수술’을 요구하고 있지만 시위대의 목소리를 제도권 안으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칠레 사태가 언제까지 갈지 현재로선 누구도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산티아고(칠레)=임종주 특파원 lim.jongju@join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