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등+9등=4등 ‘카마겟돈’ 뭉쳐야 산다

중앙일보

입력 2019.11.01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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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타바레스 CEO(左), 존 엘칸 회장(右)

세계 자동차 업계에 다시 지각변동이 시작됐다.
 
지난 5월 프랑스 르노그룹과 합병을 추진했던 피아트·크라이슬러(FCA)가 다른 프랑스 완성차 업체인 푸조·시트로엥(PSA)과 합병조건에 합의했다.

피아트·크라이슬러 이사회
푸조·시트로엥과 합병 승인
미래차 준비 위한 생존전쟁 가속
프랑스 정부 등 외부 지분 변수

31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전날 PSA 이사회는 FCA와의 합병조건을 승인했다. 두 회사의 시가총액을 더하면 약 484억 달러(약 56조원)로 최근 자동차 업계 인수·합병(M&A) 가운데 최대 규모다. 성사되면 2009년 피아트그룹이 미국 완성차 3위 업체 크라이슬러를 인수한 이후 10년 만의 대형 M&A다.
 
합병조건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월스트리트저널은 존 엘칸 FCA 회장이 이사회 의장을 맡고, 카를로스 타바레스 푸조 최고경영자(CEO)가 합병법인 CEO에 취임하는 데 합의했다고 전했다. 이사회는 타바레스 CEO를 비롯해 PSA에서 6명, FCA에서 5명이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기준 전 세계 판매량은 FCA가 484만대, PSA가 388만대다. 두 회사의 판매량을 더하면 폴크스바겐그룹(1083만대), 르노·닛산·미쓰비시 연합(1076만대), 도요타(1059만대) 등에 이은 세계 4위 완성차 업체가 된다.


글로벌 완성차 업계 판매순위.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존 엘칸 회장은 피아트 창립자 잔니 아넬리의 외손자다. 지난해 사망한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전 회장의 뒤를 이어 FCA그룹 회장에 오른 뒤 대규모 M&A를 추진해 왔다. 이른바 ‘카마겟돈(자동차와 종말을 뜻하는 아마겟돈의 합성어)’ 시대를 맞아 규모를 키우지 않고선 생존이 어렵다고 판단해서다. 막대한 미래차 연구·개발(R&D) 비용을 분담하고 시장 포트폴리오를 넓히는 것도 목적이다.
 
FCA는 피아트·란치아·알파로메오·마세라티 등을 거느린 이탈리아 최대 완성차 업체다. 엘칸 회장은 FCA 모기업인 엑소르그룹을 통해 슈퍼카 페라리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크라이슬러를 인수한 뒤 경영상황이 나빠졌고 세계 시장 점유율은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했다.
 
전임 마르치오네 회장 때부터 M&A를 추진해 왔고, 한때 현대차그룹의 인수설이 나오기도 했다. 엘칸 회장은 지난 5월 르노그룹과의 합병을 추진했지만 노조의 반대와 프랑스 정부의 미온적 태도로 한 달 만에 제안을 철회했다.
 
이번 협상의 또 다른 주역인 타바레스 CEO는 르노그룹 최고운영책임자(COO)을 지냈다. 포르투갈 출신인 그는 지난해 불명예 퇴진한 카를로스 곤 전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회장의 후계자로 꼽혔지만 사실상 곤 전 회장에 의해 축출됐다. 201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회사 밖에서 기회를 찾고 싶다”고 인터뷰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이후 PSA그룹으로 옮긴 타바레스 CEO는 재기에 성공했다. 자신을 견제했던 곤 회장이 비리 혐의로 일본 검찰에 구속되는 등 추락한 것과 대비된다. 프랑스 언론은 “FCA와의 합병에 성공하면 타바레스 CEO가 프랑스 완성차의 새로운 얼굴로 떠오를 것”이라고 보도했다.
 
세계 자동차 업계는 미래 차 변혁을 맞아 ‘적자생존’의 싸움을 벌이는 중이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도 최근 타운홀 미팅에서 “자동차 시장은 공급 과잉 상태이고 미래 자동차 업계에서 사라지는 회사가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합병이 성공적으로 끝날지는 알 수 없다.  PSA는 2014년 경영 위기 당시 프랑스 정부와 중국 둥펑기차(東風汽車)로부터 각각 13%씩의 지분을 투자받았다. 창업자 가문의 지분은 14%에 불과해 향후 협상에서 투자자의 이해관계가 변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