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99>
황푸군관학교서 장제스 총애받아
프랑스·일본·미국과의 전쟁서도
과감한 작전 편 국제적인 전략가
군사고문으로 베트남 있다 참전
호치민에게 “땅굴 파 병영 지하화”
펑더화이 지지 업고 반대론 묵살
미군 화력 견디려 갱도 공사 총력
천껑은 국·공전쟁 막바지에 윈난(雲南)에 무혈 입성했다. 윈난성 인민정부 주석과 군구사령관에 임명된 후, 중공대표단 일원으로 월남을 방문했다. 프랑스군과 전쟁 중인 호치민이 천껑의 발목을 잡았다. 청년 시절 프랑스에서 호치민과 많은 사연 남긴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도 월남 국부의 청을 마다치 않았다.
호치민이 이끄는 인도지나공산당은 자칭 16만의 병력이 있었지만 문제가 많았다. 천껑의 아들 천즈젠(陳知建·진지건)이 어른들에게 들었다며 구술을 남겼다. “월남군은 프랑스군과 몇 차례 전투를 거치며 혼란에 빠졌다. 양식과 탄약이 부족하고 집중력도 떨어졌다. 사방 수백 킬로의 밀림 속에 흩어져 있었다. 억지로 집결시켜봤자 2만여 명이 고작이었다. 아버지는 편제를 갖추고 훈련을 강화해 정규군으로 탈바꿈시켰다. 중국의 지원을 원활히 하기 위한 비밀통로도 개설했다. 호치민은 중국에 올 때마다 우리 집을 지나치지 않았다. 어렸던 나는 삐쩍 마른 노인의 수염이 어찌나 신기했던지 잡아당겼다. 옆에 있던 어른들이 깜짝 놀라며 야단쳤다. 노인은 재미있어했다. 내 볼을 쓰다듬으며 엉덩이를 두드려줬다.” 천껑과 호치민은 이런 사이였다. 호치민에게 땅굴 파고 지하를 병영화하라고 권한 사람도 천껑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천껑은 평생 일기를 썼다. 1950년 7월 8일 밤 월남에서 쓴 일기에 처음 한국을 언급했다. “조선 인민군이 계속 남진 중이다. 한강 이남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미군 일부를 섬멸했다.” 저우언라이가 보낸 귀국명령 전문을 받고 흥분했다. 11월 5일 일기장을 폈다. “나도 북조선 출병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떠돈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은 늦게 하는 것보다 일찍 하는 것이 유리하다. 몸이 들뜬다.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1차 국공합작 파열 후 국민당에 체포되기도
천껑은 1927년 1차 국공합작 파열 후 저우언라이가 지휘하던 지하공작자 시절 국민당에 체포된 적이 있었다. 온갖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채 죽을 날만 기다렸다. 국민당군의 중추로 성장한 후쫑난(胡宗南·호종남) 등 황푸군관학교 동기생들이 장제스에게 구명을 호소했다.
장제스도 총애하던 옛 부하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출옥한 천껑은 성한 곳이 없었다. 압록강 건널 때 죽장에 의지할 정도였다. 활달하고 유머가 넘치다 보니 중병 환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펑더화이는 천껑에게 지원군 총부제2부사령관을 겸직시켰다. 제1부사령관덩화(鄧華·등화)가 질색했다. 창당에서 신중국 선포까지 20여년간 덩화의 전과는 천껑에게 미칠 바가 못 됐다. 천껑은 개의치 않았다. 펑더화이의 속내를 알고 있었다. 천껑과 펑더화이는 같은 후난(湖南)성 출신이었다. 함께 근무한 적도 많았다. 덩화는 천껑을 존중했다. 항상 천껑의 뒤에 서고 셋이 사진 찍을 때도 펑더화이의 왼쪽에 자리했다.
전선을 두루 둘러본 천껑은 갱도를 파자고 제의했다. “정전 담판도 시작됐다. 협정이 언제 체결될지 가늠하기 힘들다. 이제는 공격보다 방어에 힘써야 한다. 전쟁은 마지막 전투가 가장 치열한 법이다. 미군의 화력에서 견디려면 모든 지원군이 갱도에서 생활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전 군을 갱도 공사에 투입하자.” 이의를 제기하는 지휘관이 있었다.
“갱도 파는 것은 위험이 따른다. 공사 도중 산 사람의 무덤이 될 수 있다.” 펑더화이가 천껑의 손을 들어줬다. 천껑이 지휘하는 3병단이 시범을 보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