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108, 美12표···민심잃은 트럼프, 유엔기구 30%가 中수장

중앙일보

입력 2019.10.25 05:00

수정 2019.10.25 09:56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2009년 8월 미국 타임지의 표지. 중국을 상징하는 판다 한 마리가 펌프를 가지고 지구에 바람을 넣고 있다. 유엔 산하 15개 전문기구 중 총 4곳이 중국인이 수장이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유엔 내 중국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미국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고 23일 보도했다.[사진 타임]

지난 1월 미국 워싱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케빈 몰리 국무부 국제기구 담당 차관보가 부하 직원들을 긴급히 소집했다. 중국이 차기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사무총장 선거에 나선다는 첩보가 국무부에 입수된 직후였다. 선거까진 5달이 남았지만 몰리 차관보의 목표는 분명했다. 국제무대에서 중국의 야심을 꺾는 것이다. 그는 직원들에게 “(국제기구엔) 중국만 가득하다”며 “(선거에서) 중국을 이기는데 어떤 방법이라도 쓰라”고 지시했다.
 

취동위 유엔 세계식량기구(FAO) 사무총장. FAO 창설 이래 최초의 중국인 수장이다.[EPA=연합뉴스]

 
미국의 작전은 그러나 실패했다. 6월 이탈리아 로마 FAO 본부에서 열린 선거의 승자는 중국이었다. 취동위(屈冬玉) 전 중국 농업농촌부 부부장은 191개국 중 아프리카와 중남미 국가의 압도적 지지 속에 108표를 받았다. 미국이 지지한 다비트 키르발리드체 조지아 전 농업부 장관은 12표에 그쳤다. 미국은 유럽의 지지도 못 얻었다. 유럽은 카트린 주슬랭-라넬 전 유럽식품안전국 국장(71표)에 표를 몰아줬다. 1만1500명의 직원에 예산만 연 26억 달러(약 3조69억 원)를 쓰는 거대 기구 FAO의 수장 자리를 중국인이 차지한 건 1945년 창설 후 처음이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가 23일(현지시간) 상세히 전한 전말이다. 

식량농업기구 최초 중국 사무총장
美 불편 심기에도 막을 방법 없어
트럼프 나홀로 행보가 중국 도와

중국의 국제기구 ‘외교 굴기(堀起·우뚝 섬)’가 무섭다. 취 전 부부장이 FAO 사무총장이 되면서 유엔 산하 15개 전문기구 중 약 30%인 4곳이 중국인을 수장으로 두게 됐다. 나머지 11곳은 수장의 국적이 모두 다르다. 한국인은 임기택 전 부산항만공사 사장이 국제해사기구(IMO) 사무총장으로 활동 중이다.  유엔 내 중국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미국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는 게 FP의 평가다.

유엔 15개 전문기구 수장 중 4명이 중국인. 그래픽=김영희 기자 02@joongang.co.kr

유엔 산하 전문기구 중 중국인이 조직 수장에 오른 곳은 FAO 외에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이다. 리용(李勇) 전 중국 재정부 부부장은 2013년 UNIDO 사무총장 자리에 올라있다. ITU 사무총장엔 자오허우린(趙厚麟) 전 ITU 사무차장이 2014년부터 일하고 있다. 류팡(柳芳) 전 중국민간항공총국(CAAC) 이사는 2015년 ICAO의 첫 여성 사무총장이 돼 활동 중이다.
 

류팡(柳芳)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사무총장.[사진 류팡 사무총장 트위터]

리처드 가원 국제위기감시기구(ICG) 연구원은 AFP통신에 “중국 정부는 최근 몇 해 동안 유엔 산하 기구 수장 자리를 차지해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아프리카와 중남미 국가에 대규모 자본을 투자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말했다. FP는 “이러한 중국의 행보는 시진핑 국가주석이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 육상·해상 실크로드) 정책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6월 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등 미국 대표단을 향해 중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선 중국인 유엔 수장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미 싱크탱크 신미국안보센터(Center for a New American Security)의 크리스틴 리 연구원은 “중국인 국제기구 수장은 자신의 권한을 남용해 중국 정부에 내부 정보를 보고할 거란 우려가 있다”며 “이들은 유엔 내에서 다자주의를 발전시키고 투명성과 책임을 강화하는 데 힘쓰기보다 중국 공산당의 관심사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취 사무총장은 FAO 선거 운동 중 경쟁 후보로부터 ‘(취 후보는) 중국 정부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란 공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취 사무총장은 “난 유럽과 미국에서도 교육을 받았다”며 “FAO의 규정과 규칙을 따를 것”이라고 반박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은 중국의 국제무대 부상을 불편하게 바라보고 있다.[중앙포토]

중국과 무역전쟁 중인 미국으로선 라이벌의 외교무대 부상이 매우 불편하다.  무엇보다 FAO 수장을 중국에 뺏긴 것은 미국에 치명타란 분석도 나온다. 농업은 무역전쟁에서 중국이 미국을 공격하는 대표적 분야다. FP는 FAO 선거 실패 후 미 국무부에선 '국제기구 수장 선거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지시가 내려졌다고 전했다. 
 
문제는 미국으로선 당장 중국의 외교 굴기를 막을 방법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유엔 내에서 중국이 영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준 것이 결과적으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신화통신=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17년 취임 후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펼쳤다. 특히 유엔 등 국제기구에 미국이 부담금을 너무 많이 내고 있다며 예산 축소를 지시했다. 또한 시리아 등 중동에서 미군을 철수하고, 아시아에선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구하는 등 동맹국과의 사이도 좋지 않다. 여당인 공화당과 행정부 관리의 비판에도 트럼프는 특유의 '계산서 외교'를 굽히지 않고 있다.
 
이런 와중에 중국은 미국에 실망한 각국에 손길을 내밀고 있다. FP는 “미국 정부는 동맹국과 지속적으로 충돌하면서 독자 행보에 대한 경고를 무시해왔다”며 “그 사이 중국은 미국의 빈자리를 메우며 개발도상국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외교적 야망을 실현해왔다”고 분석했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