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달 새 대기업 인수합병(M&A) 시장에서 일어난 ‘지각변동’이다. 시장에서 충분히 예상 가능한 업종 간 ‘동종교배’ M&A 틀을 깨고 업종 간 울타리를 허무는 식의 ‘이종융합’ M&A가 늘어나는 추세다. 조명현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전 한국기업지배구조원장)는 "성장은 정체하는데 빅 데이터를 가진 정보기술(IT) 기업을 중심으로 기술 격차가 심화하고 있다"며 "기업이 새 시장에 뛰어들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정주영식’ 성공 모델을 추구하기 어려워졌다"고 진단했다. 대신 “막대한 현금을 실탄 삼아 M&A를 미래 먹거리 확보를 위한 ‘돌파구’로 삼는 기업이 늘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결국 M&A를 최종 심사하는 공정거래위원회의 판단도 중요해졌다.
동종교배보다 '이종융합' 트렌드
작년 702건 486조원 10년새 최대
예측 못한 M&A로 단숨에 시장 선도
현대중, LGU+,SKT 줄줄이 대기
"공정위 심사 오래 걸린다" 불만
'덩치 불리기'식 M&A에서 '빅 딜'까지
무리하게 덩치를 불리는 과정에서 ‘승자의 저주’에 빠진 기업도 나왔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대표적이다. 최근 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아시아나항공까지 매각하는 위기에 빠진 직접적인 원인이 2005년 대우건설 인수다. 대우건설은 당시 시공능력 1위 대형 건설사였다. 계열사인 금호건설이 품기에 큰 매물인 데다 그룹 자금 사정도 넉넉하지 않았지만, 계열사 자금을 총동원하고 투자금융 자본까지 끌어들여 6조4255억원에 인수했다. 결국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버티지 못하고 2009년 도로 매물로 토해냈다.
단순한 덩치 불리기에서 벗어나 좀 더 정교한 M&A가 늘어난 건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고 나서다. 계열사 간 시너지를 노린 M&A가 이어졌다. 서로 약점을 보완하는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시도다. 2011년 당시 물류업계 1위인 대한통운(CJ대한통운)을 1조9800억 원에 인수한 CJ가 대표적이다. CJ 관계자는 “육상 운송, 항만 하역 같은 ‘하드웨어(HW)’ 인프라가 탄탄한 대한통운과 물류 정보기술(IT), 공급망관리(SCM) 등 ‘소프트웨어(SW)’ 강점을 가진 CJ GLS(CJ 물류계열사)가 합병하면서 그룹이 새 성장동력을 갖추게 됐다”고 설명했다.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하는’ 식의 M&A는 삼성ㆍ한화가 2014년 보여줬다. 삼성은 비주력 사업인 방위ㆍ석유화학 사업을 정리하면서 주력 사업인 전자 부문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1조9000억원이란 인수 대금을 쥐게 된 건 덤이다. 삼성에게 사업을 넘겨받은 한화는 기존 한화의 방위ㆍ석유화학 산업에서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1등 업체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했다. 삼성-한화 빅딜을 자문한 법무법인 태평양 이준기 변호사는 “규모도 규모지만, 두 회사 간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거래 내용이 과감했다”며 “두 회사 간 거래가 M&A ‘빅 딜’로 꼽히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이종융합' 두드러진 최근 M&A
올 들어선 M&A의 이종융합 구도가 더 두드러진다. 게임업체 넷마블은 지난 14일 렌털 업체인 웅진코웨이 인수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인수가로 1조 8000억원 중반대를 써낸 것으로 알려졌다. ‘접점’이 없어 보이지만 넷마블은 코웨이 인수로 ‘구독경제’ 사업을 확장할 구상을 갖고 있다. 구독경제는 매달 일정 금액을 내면 맞춤형 서비스를 받는 형태의 사업구조다. 서장원 넷마블 부사장은 “정수기ㆍ공기청정기 같은 집안 내 사물인터넷(IoT) 기기를 연결해 스마트홈을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최근엔 주택건설ㆍ레저 산업이 주력인 HDC현대산업개발이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기업이 이종융합 M&A에 적극적인 건 ‘게임의 룰’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기술 우위보다 외부와 협업이 더 큰 가치를 가져오는 ‘네트워크 시대’로 진입하면서다. 이태규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 연구위원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의 손쉬운 M&A로는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어렵게 됐다”며 “예상치 못한 M&A를 통해서만 ‘퀀텀 점프’할 수 있다는 경각심이 퍼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인수했다고 인수한 게 아니다… 공정위 ‘문전성시’
현재만 해도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해양 인수, LG유플러스의 CJ헬로 인수, SK텔레콤의 티브로드 인수 같은 대형 M&A가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게임업체 넥슨, 아시아나항공도 M&A 매물로 대기 중이다. 황윤환 과장은 “경제성장률이 낮아지고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사업 구조를 재편하려는 목적의 M&A가 늘었다”고 말했다.
기업의 불만은 심사가 오래 걸린다는 점이다. 분초를 다투며 경쟁하는 상황에서 공정위 심사대에 걸려 나아갈 수 없다는 불만이다. 여기엔 심사 인력이 부족한 측면도 있다. 올해 7월 기준 공정위 기업 결합 심사 인력은 8명이다. 2016년 기준으로 보면 한국은 7명이 646건의 기업 결합을 심사해 1인당 연간 심사 건수가 92건으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미국은 172명이 1801건, EU는 64명이 318건을 심사해 1인당 연간 심사 건수가 각각 11건, 5건에 불과했다.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공정위의 심사 건수 대비 인력 수가 부족해 늦장ㆍ부실 심사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조성욱 변수'까지… "공정위 심사 잣대 유연해져야"
재계에선 공정위의 심사 잣대가 과거와 달라져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권태신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은 “공정위 M&A 심사는 공정경쟁을 제한할지에 대해서 판단하는 절차인데 과거 동일 업종 위주 M&A에서 이종융합식 M&A가 확산하면서 (공정경쟁을 제한하는) 요소가 많이 사라졌다”며 “공정위 심사가 ‘규제를 위한 규제’나 기업을 옥죄는 수단이 되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황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과거 깐깐하게 들이댄 전통적인 기업결합 심사 잣대를 최근 경향에 맞도록 유연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학계에서도 나온다”며 “무엇보다 공정위가 일관성을 갖고 기업결합을 심사해 기업의 불확실성을 줄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황윤환 과장은 “대규모 M&A가 아니고선 90% 이상은 순수 심사 기간이 20일 이내 처리하고 있다”며 “시장 경쟁을 제한할 우려가 없는 경우 적시에 M&A가 이뤄질 수 있도록 신속히 심사ㆍ처리하겠다”고 말했다.
세종=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