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피아니스트 황상혁 첫 단독 인터뷰
북한 체제에서 음악·예술인들은 나름대로 안정적 생활을 보장받는다. 그런데 촉망받는 중견 음악인들이 북한 체제를 벗어나 탈북·망명의 길을 떠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김정은 집권 이후 은밀하게 번지고 있는 핵심 엘리트층의 탈북 행렬에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게 대북 정보 관계자의 귀띔이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은둔생활을 하거나 활동 여건이 나은 제3국으로의 재망명을 택한다. 한국 정착 5년여 만에 베일을 벗은 한 탈북 피아니스트를 만나 북한 음악계의 속사정을 들어봤다.
5년 전 옌지에서 사라진 ‘황 교수’
“이설주와 사제지간 보도는 오보”
평양서 고위층 자제 과외로 인기
서울대 석사 마치고 공개 활동
일각에선 그가 김정은의 부인 이설주와 각별한 관계였다는 관측을 제기하며 북한의 이례적인 체포 움직임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더는 황 교수의 행방은 드러나지 않았고, 북한 당국도 추가 움직임은 없었다. 언론이나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잊혔다.
그는 몇 가지 팩트와 다른 게 있다고 했다. 우선 자신은 피바다가극단과 무관하다고 설명했다. 옌지에 머물던 일행 중 그 가극단 소속이 많았지만 자신은 평양음대 교수 자격으로 파견됐다는 것이다. 이설주의 스승이었다는 등의 일부 언론 보도도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황상혁(45)씨는 “한국 대사관에서도 ‘당신이 이설주와 무슨 관계냐’고 묻길래 의아하게 생각됐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궁금한 건 왜, 어떻게 한국 행을 택하게 됐는가 하는 점이었다. 황씨는 “동료들과 중국 옌지에 체류하던 중 우연히 한국 사람들과 어울리게 됐는데, 보위부가 이를 포착해 내사에 들어가면서 처벌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과거 해외 유학생 출신의 지휘자인 이동철이 독일의 한 맥줏집에서 한국인이 포함된 일행과 접촉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감옥살이를 하는 걸 본 뒤로 공포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황씨는 “평양의 공연장에서 악단을 이끌던 중 강제로 끌려나간 이동철은 3년형을 받고 폐인이 된 데다 가족마저 뿔뿔이 흩어졌다”고 전했다. 체코 출신의 유학생 송강은 외부 사조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공연을 마친 뒤 곧바로 족쇄가 채워져 끌려나가기도 했다는 것이다.
해외에 나가는 북한 주민들은 ‘절대 접촉하거나 가지 말아야 하는 3국가’로 남조선(한국)·미국·이스라엘을 꼽는 지침을 받는다. 황씨는 “당초 미국이나 일본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만 안 가면 평양의 가족들이 다치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과 제3국을 거치는 과정에서 폐기흉으로 다른 국가로 옮겨져 큰 수술을 받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고 결국 한국으로 귀착됐다고 한다.
황씨는 북한에서 잘나가는 피아니스트이자 평양음대 교수였다.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이용철의 손녀와 북한군 김광진 차수의 손자 등 최고위층의 자녀들이 그의 피아노 과외를 받으려 줄을 서야 했다. 성악곡 ‘압록강 2000리’를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데 이어 영화로 잘 알려진 ‘도시처녀 시집와요’의 주제가를 편곡해 각광받았다. 황씨는 “내가 탈북한 이후 모두 북한에서 금지곡이 됐다고 들었다”고 했다.
이렇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건 타고난 재능에다 든든한 집안 배경이 작용했다. 김일성·김정일 경호를 책임진 호위사령부 부부장을 지낸 외할아버지 덕분에 그는 평양 만수대의사당(우리의 국회의사당에 해당) 옆 서문동 5호관저 초대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9살 때 아들의 손을 잡고 평양학생소년궁전을 찾아 피아노 소조 활동을 시작하게 했다. 이 시절 그는 7차 차이콥스키 국제음악콩쿠르에서 특등상을 받은 바이올린 연주자 백고산과 함께 피아노 협연을 했고, 북한의 간판급 선전화보 ‘조선’에 실리기도 했다.
14살에 평양음악무용대 기악과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한 황씨는 북한 최고의 피아노 연주가이자 교육가로 알려진 이경린으로부터 사사(師事)했다. 1953년 소련 레닌그라드 국립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이경린은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남산의 푸른 소나무’ ‘빛나라 정일봉’ 같은 체제 찬양 피아노 독주곡을 창작해 38살에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
황씨에 따르면 북한의 클래식 음악 계보는 ▶한국 전쟁 당시 소련 유학을 다녀온 1세대 ▶1970~80년대 초 소련에서 기술을 전수받은 2세대 그룹 ▶1980년대 중엽부터 1993년까지 동유럽에 유학하거나 사회주의권 붕괴로 중도 귀환한 3세대 ▶2000년대 들어와 오스트리아 지휘 유학을 포함해 독일 등지에서 공부한 4세대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지난 5년간 황씨는 모든 공개활동을 접고 경기도 분당의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에 매진했다. 임대아파트에서 월 70만원 안팎의 보조금으로 버텨야 하는 곤궁한 생활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의 예술혼을 달래준 건 서울대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하며 경험한 한국과 서방 세계의 음악이다. 피아노에 대한 열정을 더는 억누르기 어렵다고 판단한 황씨는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초청 공연 등 공개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설 생각이다. 황씨는 “나는 그저 피아노를 연주하는 순수 예술인”이라며 “남북 분단이나 이데올로기는 나의 영역이 아니며 음악 열정 또한 막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