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뿐 아니라 내용도 그랬다. 핵 실험과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발사 중단이 선제적 비핵화 조치였다며 유엔 제재와 미국 독자 제재를 먼저 풀라고도 요구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하노이에서 영변 폐기와 2016년 이후 유엔 5개 제재 해제의 교환을 제안한 것도 뒤집고 미국의 일방적 양보부터 요구했다. 더 나가 “완전하고, 되돌릴 수 없게 대북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기 전에는 협상할 의욕이 없다” “핵·ICBM 발사 재개는 미국에 달렸다”라고 위협도 했다.
김명길 대사가 2주 후에 다시 만나자는 비건 대표의 제안도 뿌리치고 연말까지 숙고하라고 한 것도 민주당의 하원 탄핵안 표결 시점과 일치한다. 공화당이 53대 47로 우세한 상원에선 탄핵 심판이 통과될 가능성은 작지만, 내년 2월 아이오와를 시작으로 주별 대선 경선이 시작되기 전에 대북 성과에 조바심을 낼 것이란 계산도 깔렸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셈법대로 목을 매며 움직이지 않고 있다. 당장 “내전(civil war)” “헌정 위기” 사태라며 민주당과 싸우느라 북핵 협상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상당한 비핵화 성과도 없이 북한에 양보해 보수표를 잃는 것도 트럼프의 선택지는 아니다. 그렇다고 북한이 ICBM 발사로 미 본토를 위협한다면, 판은 완전히 깨진다. 트럼프도 안보를 선거 무기로 쓸 수 있다.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워싱턴 방문을 마치고 “북한이 어떤 핑계를 잡을지 몰라 조심한다. 미국 측 분위기도 얘기 못 한다”고 했다. 우리만 저자세로 매달린다고 협상이 타결되는 건 아니다.
정효식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