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0~22일 일본 아이치현에서 열린 ‘데상트 레이디스 도카이 클래식’에서 두 타 차로 일본의 신성 시부노 히나코(?野日向子)에 우승을 넘겨준 이지희(40)가 지난달 30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2001년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에 데뷔한 이지희에겐 500번째 출전한 대회였다. 첫 라운드에서 개인 최저타 신기록인 63타를 쳤고, 194야드 파3홀에서 홀인원도 기록했다. 또 후반 9홀에서 28타를 기록하며 ‘9홀 29타이하’를 친 일본 투어 최고령(40세220일) 여자선수가 됐다. 502번째 대회인 일본여자오픈골프선수권 대회(10월 3~6일)를 앞두고 그를 지난달 30일 인터뷰했다.
-500번째 대회에서 우승은 놓쳤지만, 좋은 일이 많았다.
“사실 500번째 대회인 줄 몰랐다. 1라운드를 마치고 인터뷰에서 ‘500번째 경기인데 어땠느냐’는 질문을 받고 알았다.”
-그렇다면 베스트 스코어가 가장 기뻤나.
“맞다. 우승한 느낌이 들 정도로 첫날이 너무 좋았다. 그동안 8언더가 베스트였는데, 마지막 홀에서 2m 버디 퍼트를 남기고, ‘이걸 넣어야 9언더가 된다’는 생각에 긴장을 많이 했다. ”
-최고령 ‘9홀 29타 이하’ 기록도 세웠다.
“저는 (나이를) 잘 실감을 못하는데, 인터뷰때 마다 자주 듣는다. 일본 골프 협회 회장이 매주 인사말에서 ‘여자 골프는 재미 있다. 스무살도 안 된 선수가 우승하고, 40살 이지희 선수도 우승(4월 반테린 레이디스오픈)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또 ‘너 40살이냐’고 묻는다.”
-연속 상금 시드 기록도 이어가는 중이다.
“상금 순위 50위안에 들면 이듬해 전 경기에 출장할 수 있는 시드 선수가 된다. 2002년부터 18년 연속 시드를 획득해 후도 유리의 기록(17년 연속)을 깼다. ”
-슬럼프는 없었나.
“있다 없다 하는데 큰 슬럼프는 없었다. 큰 부상이 없었던 걸 감사하게 생각한다. 성격도 단순한 편이라 잘 잊어버린다. 골프는 단순해야 좋은 것 같다.”
“당시엔 그런 음모론도 많았다. 하지만 TV로 보면 (1m 거리로) 짧아보여도 경사가 심했다. 충분히 그럴 수(3퍼트를 할 수)있는 홀 컵 위치였다. ”
-지금 생각해도 아쉬운가.
“내가 더 잘 쳤어야 했다는 생각, 또 ‘어떻게 후도 선수가 1m 거리에서 3퍼트를 할 수 있지’라는 (억울한)생각이 공존했다. 나중에 따져보니 내가 마지막 홀에서 파(par)만 했어도 상금 1위가 될 수 있었는데,보기를 하고 말았다. 물론 아쉬움이 컸지만, 그 아쉬움 때문에 지금까지 꾸준히 해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동기 유발이 됐다.”
“라이벌이라기 보다 후도 유리는 여러 모로 배울 게 많다. 기계라도 그 정도는 못 칠 정도로 정말 정확하게 친다. 게다가 워낙 겸손하다. 존경하는 선수다. ”
-생애 누적상금 순위에서 후도 유리(13억6400만엔)에 이어 2위(11억9500만엔)를 달리고 있다. 남은 목표가 있다면.
“일본에서 총 23승을 했다. 30승을 하면 언제든 원하면 출전할 수 있는 ‘영구 시드’를 받는다. 상금 2위만 세 번을 했끼 때문에 ‘넌 왜 2등만 하느냐’는 이야기도 자주 들었다. 상금왕과 영구 시드가 목표다. 그걸 보면서 가고 있다.”
-언제까지 프로 골퍼로서 활약할 생각인가.
“20대 중후반때는 서른이면 투어를 못 뛸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른 넘어서까지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했다. 30대 중반이 되면서는 ‘마흔이 되면 거리도 안 나가고 체력도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골프 클럽 (성능)도 좋아지고, 공도 좋아지고, 그래서 거리도 별로 안줄고, 생각만큼 힘들지도 않더라. 그래서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몇 살까지 할 지는 나도 궁금하다.”
-애초에 왜 일본을 선택했나. 선택에 후회는 없나.
“한국에서 데뷔했던 1998년부터 IMF(경제위기)로 대회가 거의 없었다. ‘가까우니 여기서 한번 해보자’고 왔는데 경기 수도 많고, 상금도 많고, 무엇보다 투어환경이 너무 좋았다. 택배 시스템이 잘 돼 있어 골프채를 안가지고 다녀도 되고, 후회는 없다.”
-일본어 등 일본 생활 적응에 어려움은 없었나.
“처음엔 한마디도 못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친절하기 때문에 천천히 얘기를 해주는데, 어차피 못하는데 천천해 해도 못알아듣는데, 오히려 계속 얘기해 주는 게 무서워 한동안은 땅만 보고 다녔다. ”
-차별을 경험한 적은 없나.
“뉴스를 보면 ‘한일관계가 안 좋구나’ 느끼지만 골프장에서 느낄 정도는 아니다. 갤러리들도 ‘한국 선수지만 응원을 한다’가 아니라 그냥 ‘골프 선수’로 본다.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어린 일본 선수들은 국적과 상관없이 골프치는 선배로 보는 것 같다. 그런 게 좋다.”
-한ㆍ일관계가 안좋으면 불편하긴 하지 않나.
“그렇다. 스포츠 교류는 정치와는 별개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이지희에게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한ㆍ일관계가 어렵고, 민감한 시기이지만 나는 일본에서 받은 게 많다. 투어 환경이나 동료, 팬과 스폰서 등으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아 좋은 선수로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일본에선 올해 브리티시 오픈에서 우승한 시부노 히나코의 인기가 대단하다.
“데뷔 첫 해 신인인데, 갑자기 성적이 확 올라왔기 때문에 자신감이 클 것이다. 건강하고 밝은 이미지와 태도가 운동 선수로서는 큰 강점이다. ‘골프가 그렇게 잘 되면 밝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농담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 여자 골프에선 시부노를 비롯한 ‘황금세대’로 불리는 98년생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한국이 긴장해야 하나.
“한국은 레벨이 다르다. 전인지 다음엔 잘 칠 선수가 많지 않다고 했는데 이후 박성현이 나오고, 이정은, 고진영이 또 있지 않나. 잠재력을 갖고 있는 선수들이 많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sswo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