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온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4대손, "할아버지 조국에서 배우고 싶어"

중앙일보

입력 2019.09.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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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어머니와 함께 서울 시내를 구경하며 한복체험을 한 초이 일리야 [사진 문영숙 이사장]

 
독립 운동가 최재형 선생(1860~1920)의 현손(玄孫·4대손)이 고조할아버지의 나라에서 한국어를 배우게 됐다. 인천대는 최재형 선생의 현손인 초이 일리야 세르게예비치(17·사진)가 18일 개강하는 인천대 글로벌어학원에 입학해 1년 동안 한국어 강의를 듣는다고 17일 밝혔다.
 
초이 일리야는 최재형 선생 손자(인노켄티)의 손자다. 지난 7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러시아 소재의 한 대학 공학 계열에 합격했다. 그러나 인천대로부터 글로벌 어학원 입학을 제안받고 한국 행을 택했다고 한다. 최용규 인천대학교 이사장은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할아버지의 조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추석 때 역사적 장소 찾아

초이 일리야는 어머니 등과 안중근 의사 가묘가 있는 효창공원을 방문했다. [사진 문영숙 이사장]

 
초이 일리야는 지난 12일 오전 어머니 코사리코바 마리나(41)와 함께 입국했다. 그의 어머니는 지난 11일 초이 일리야의 비자가 나오자마자 4박 5일의 휴가를 내고 그와 함께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추석 연휴 기간 이들은 최재형 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의 지원을 받아 서울에 머무르며 경복궁, 남산, 용산 전쟁기념관, 국립 서울현충원 등을 찾았다. 문영숙 최재형 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주 안내를 맡았고 기념사업회 장학생인 고려인 남 세르게이(22)가 통역 등을 도왔다.


문 이사장은 “초이 일리야 가족을 경복궁 등으로 안내해 한국 문화를 소개했다”면서 “최재형 선생 기념비가 있는 국립 서울 현충원과 안중근 의사 가묘가 있는 효창공원도 찾아 묵념도 하고 의미를 설명했다”고 말했다.
 

한국어 서툴지만 ‘독립운동 영웅 후손’에 자부심

어머니 코사리코바 마리나(왼쪽)와 초이 일리야. [사진 문영숙 이사장]

 
초이 일리야는 한국행을 결정한 이후부터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지만, 아직 서툰 편이다. 현재 한글을 간신히 익힌 정도다. 그러나 최재형 선생의 활약상은 익히 알고 있다고 한다. 할머니로부터 ‘(최재형 선생이) 한인들을 위한 소학교를 세우고 독립투사단도 조직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어릴 적부터 듣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7월 경상북도가 주최한 재러시아 독립운동가 후손 초청 행사로 한국 땅을 밟았다. 당시 항일 운동 유적지 등을 견학한 초이 일리야는 자신이 독립운동 영웅의 후손이란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올해 1월 중앙일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해에 할아버지의 나라를 꼭 다시 한번 방문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후 올해 2월 인천대가 기념사업회를 통해 초이 일리야에게 글로벌 어학원 입학을 제안하면서 그의 희망은 현실이 됐다.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초이 일리야가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한국어를 배우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적지 않은 후원 문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자신이 소유한 오피스텔을 빌려주겠다는 사람도 등장하면서 숙소 문제도 해결됐다.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초이 일리야는 기념사업회의 고려인 동포 장학금 외에도 여러 후원을 받을 예정”이라며 “빅 베이비(초이 일리야)가 걱정된다던 초이 일리야의 어머니도 설명을 듣고 안심하고 러시아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초이 일리야가 인천대 글로벌 어학원에서 한국어 강의를 일정 성적 이상으로 수료하면 내년 인천대 학부 과정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진다. 공학 계열에 관심이 높은 그는 한국어 공부에 매진해 한국에서 자신의 꿈에 도전할 계획이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의사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포토]

 
최재형 선생은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 일대서 독립운동을 했다. 지난해 6월 문재인 대통령이 러시아 하원 연설 도중 안중근 의사 등과 함께 언급해 주목을 받았다. 그는 러시아 군대에 물건을 납품하면서 축적한 부를 토대로 무장 독립투쟁을 지원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 무기 구매에도 그의 도움이 있었다. 연해주 내 한인 마을마다 소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는 일제가 고려인을 무차별 학살한 1920년 4월 순국했고 유가족들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사후 42년만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3급)을 추서했다.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