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미래를 보는 나라와 과거를 보는 나라

중앙일보

입력 2019.09.17 14:51

수정 2019.09.17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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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펑펑 나는데…‘석유 고갈 미래’ 그려

 

아부다비국제전시장 1층 제5전시장(H5) 에미레이트원자력공사(ENEC) 부스. 문재인 대통령 사진을 붙일 정도로 원전은 UAE의 국가적 자랑이다. 아부다비 = 문희철 기자

 
아랍에미레이트(UAE)는 말 그대로 기름이 펑펑 솟아나는 국가다. 세계에서 6번째로 많은 원유(1000억배럴)가 묻혀있어 지금 세대는 당연하고 자녀세대까지 먹고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 국가가 한국 기술을 빌어 원자력발전소 4기를 건설하고 있다. 심지어 아부다비공항 근처에서 화석연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탄소제로’ 도시(마스다르시티)를 세우는 중이다. 석유가 물처럼 흔한 국가에서 석유 한 방울도 안 쓰는 신도시를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중앙일보가 12일(현지시각) 방문한 마스다르시티는 이미 태양광·태양열·지열·풍력·폐기물발전만으로 도시 전력 전체를 충당하고, 기름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자율주행차량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제24차 세계에너지총회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가장 큰 전시장을 마련해서 자국의 '비전2030'을 소개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비전2030의 일환으로 원전 2기를 건설할 계획이다. 아부다비 = 문희철 기자

 
UAE 서남쪽으로 국경을 마주한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도 마찬가지다. 제24회 세계에너지총회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국의 에너지 비전(비전2030)을 주제로 전시관을 꾸몄다. 여기서 사우디아라비아는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가져온 한국형 원자로 모형을 전시했다. 심지어 원자로의 작동원리를 설명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인 모하메드 자크리 씨는 명함 뒷면을 영어 대신 한국어로 써넣고 다녔다.
 

UAE에서 열린 세계에너지총회 사우디아라비아관에서 만난 모하메드 자크리 씨. 한국어 명함을 파고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가져온 한국형 원자로 모형의 작동원리를 설명했다. 명함 뒷편으로 자크리 씨와 한국형 원자로가 보인다. 아부다비 = 문희철 기자

 

천우신조 기회…韓,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이처럼 중동 산유국이 적극적으로 미래를 개척하는 모습을 보면 한국의 에너지 전략에 아쉬움이 남는다. 알아서 ‘탈원전’을 외치며 세계가 인정한 원자력발전 기술의 생태계를 뒤흔들었다.


미국은 한국과 손잡고 중동 시장에 원전을 수출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탈원전 정책과 원전 수출은 별개의 얘기’라며 ‘수출까지 막지는 않겠다’는 입장으로 전해진다.  ▶중앙일보 17일 종합1면
 

세계에너지총회가 열린 아부다비국제전시장 에미레이트원자력공사 부스 한쪽 벽면을 4미터 크기의 문재인 대통령 사진이 덮고 있다. 아부다비 = 문희철 기자

 
선제적으로 움직여도 어려운 체스판에서 한국 정부가 소극적으로 말을 둔다면 원전 수출 기회를 사실상 포기하는 행동이다. 수백조원이 달린 원전 수출 시장에서 경쟁국이 한국 원전 기술을 마타도어 하면서까지 매달리고 있어서다. 아부다비에서 만난 원자력업계 관계자는 “러시아가 한국 ‘탈원전’ 기사를 아랍어로 꼼꼼하게 번역해서 가져다주면서, ‘조만간 한국 원전 산업 생태계는 무너질 수 있다’더라”고 귀띔했다. 2009년 이후 한국 원전 수출 실적이 ‘0’이다. 같은 기간 러시아는 12개국에서 36기의 원전을 수주했다.
 

문희철 기자

지금 ‘팀코리아’를 이끄는 정부는 적폐청산·한일역사 문제에 사로잡혀 미래로 시선을 두지 못한다. 과거사에만 매달려만 있으면 ‘미래 100년 먹거리’를 확보하지 못한다. 후손이 대대손손 향유할 경제의 밑천을 다지는 정부가 필요한 시점이다.
문희철 산업1팀 기자 reporte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