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것 : 두 번째 이야기') 공포는 누가 만드는 가, 어떻게 벗어 나는가

중앙일보

입력 2019.09.17 13:34

수정 2019.09.26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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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임진순

 
 
무려 1800쪽에 달하는 스티븐 킹의 역작 중의 역작이자 대하 공포판타지 소설인 <그것, It>을 영화로 만드는 것에는 ‘감히’ 혹은 ‘설마’ 또는 ‘불가능한’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마련이었다. 그건 마치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영화로 만드는 일과 같은 것으로 간주됐다. 영화 <반지의 제왕>이라는 위업은 피터 잭슨이 달성했다. 그러나 피터 잭슨은 사전에 검증이 여러 차례 이루어진 감독이었다. 
그에 비하면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이 작품의 영화화를 아르헨티나 출신의, 비교적 ‘듣보잡’인 40대 신예 감독이 만들어 내리라고는 그 누구도 쉽게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원작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현 시대와 문화에 대한 레퍼런스를 가득 담은 작품으로 말이다. 
안드레이 무시에티 감독은 2017년 영화 <그것>에 이어 속편인 <그것 : 두 번째 이야기, It Chater Two>까지 섭렵함으로써 스티븐 킹의 문학을 영화로 완결해 내는 데 성공했다. 무시에티는 길예르모 델 토로가 제작을 맡은 공포영화 <마마>의 연출로 언젠가 큰 사고를 칠 감독으로 점쳐져 왔다(엄마 귀신이 아이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애들을 죽음의 세계로 데려 가려 하지만 그 아이들을 사랑하게 된 계모가 이를 막아 서자 결국 한 아이는 두고 한 아이만 데려 간다는 내용의, 모성애를 공포의 설정으로 삼은 특이한 작품. 가장 슬프면서도 가장 무서운 엄마 귀신 이야기였던 셈이다). 다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을 뿐이다. 특히 이번 속편은 169분이라는 길고 긴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하는, 진부한 표현을 빌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보게 만들 만큼, 공포와 재미의 롤러코스터를 오르내리게 만든다. 오랜만에 만나는 공포 판타지의 수작이다.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다는 것은 실로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오동진의 라스트필름 5.
(오동진 평론가의 영화 에세이)

영화 &#39;그것 : 두 번째 이야기&#39;

등장인물 일곱, 곧 빌(제임스 맥어보이)과 베벌리(제시카 채시테인), 리치(빌 헤이더)와 벤(제이 라이언), 마이크(이사야 무스타파)와 에디(제임스 랜슨) 그리고 스탠리(앤디 빈) 등은 27년 전인 어릴 적에 심각한 사건을 겪고 고향을 떠나 트라우마를 잊으려고 현재 자신의 일에 매진하며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이다. 빌은 공포소설 작가 겸 시나리오 작가가 됐고 베벌리는 성공한 사업체의 CEO지만 폭력 남편과 살고 있으며 리치는 스탠딩 코미디언으로 에디는 건축가 등등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어릴 때 ‘루저’라 불리며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모두들 심리적 핸디캡을 적어도 하나씩은 안고 살았다. 누구는 말을 더듬는 것 때문에, 누구는 뚱뚱하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아 마음 속 상처가 심했으며 또 누구는 마마보이인데 고도 비만인 엄마 때문에 늘 비아냥의 대상이었고 누구는 폭력 성향의 아버지가 자신을 두고 툭하면 ‘엄마를 죽인 계집’이라고 비난하는 일 때문에 항상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했다. 서커스단 광대의 이미지인 페니와이즈는 그런 이들에게 접근해 같이 놀아 주려는 척하다가 해치거나 잡아 먹으려고 애를 쓴다. 아이들도 안다. 페니와이즈를 없애려면 자신이 겪고 있는 평소의 공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 성인이 된 이들은 더욱 더 그 점을 자각한다. 페니와이즈를 완전하게 ‘처치하려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유년의 공포=근원의 공포’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그 공포가 결국 자신들 인생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을. 
문제는 그걸 아는 것과 그걸 없애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대개 근원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데 ‘그것’을 대체 누가 만들었으며, 어디서부터 왔으며 또 궁극적으로 그것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 간다. 그렇게 공포에 굴복하는 삶을 선택하고 만다.    

영화 &#39;그것 : 두 번째 이야기&#39;

 
27년 전 사건은 주인공 격인 빌(제임스 맥어보이)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동생을 혼자 놀러 보냈고 이 동생이 하수구 급류에 휩쓸려 익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빌과 친구들은 ‘페니와이즈’라 불리는 광대가 동생을 꼬드겨 죽음에 이르게 했음을 알게 된다. 광대 외모의 페니와이즈는 이때부터 이들의 주변을 떠돌며 살인을 저지르고 기괴한 일들을 자행해 아이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27년 전 아이들은 페니와이즈를 떠나게 하는 데까지는(죽이지는 못하고) 간신히 성공하지만 만약 다시 ‘그것’이 돌아 오면 함께 모여 또 한번 힘을 합치자고 서약한다. 그리고 27년이 지나 데리 마을에 또 한번 이유 모를 과도한 폭력과 살인이 이어지게 되면서 친구들은 어릴 적 사건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고향 땅을 지키던 마이크로부터 다들 서약을 지키라는 통보를 받는다. 
모두들 어린 시절의 공포가 떠올라 돌아오기까지 전전긍긍한다. 이 과정에서 스탠리는 자살을 하고 나머지 다섯 명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이크 앞에 모여 든다. 그리고 무지막지한 공포에 떨면서도 페니와이즈와의 일대 혈전을 준비해 나간다. 이제 성인이 된 어릴 적 친구들은 과연 ‘페니와이즈=유년 시절의 공포’와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영화는 공포와 드라마, 판타지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사람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기 시작한다.  
 

영화 &#39;그것 : 두 번째 이야기&#39;

소설 <그것>은 스티븐 킹이 명백하게 자신이 이전에 쓴 중편 소설 <스탠 바이 미>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그러는 김에 자신이 추구하는 공포의 세계가 인간에게 얼마나 근원적인 것인가를 파헤친 작품이다. 공포의 근원성을 위해 그는 이야기의 설정을 유년기의 특정한 경험에서 시작하는 버릇이 있는데(<스탠 바이 미>에서는 아이들이 남자 시체를 찾아 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것>에서는 빌의 어린 동생의 죽음에서부터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작인 <그것>이 상당 부분 이야기의 도화선을 이어 붙인 후 막 불을 당기는 분위기에서 끝났다면 이번 <그것 : 두 번째 이야기>는 그 이야기의 폭탄이 터지는 상황이 영화 내내 그려진다. 당연히 전작에 비해 이번 영화가 훨씬 더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다. 2시간 40분이라는 시간으로 이야기의 분량도 늘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인공들 개개인이 숙명처럼 지니고 있던 공포심과 그 형상(광대가 흉측한 이빨을 드러 내고 아이들을 잡아먹는 장면 같은 것, 목이 잘린 시체가 움직이고, 좁은 화장실 안이 피바다로 차오르는 것 등등)에서 벗어나 바야흐로 진짜 어른, 성인이 돼 가는 과정이 남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우리 역시 스스로가 갖고 있는 공포심, 내 안의 공포에서 제대로 벗어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 공포는 단순하게 각자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악몽이나 특별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사회화의 과정에서 누구나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게 되는 무엇일까. 사람이 성장하고 그럼으로써 사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오히려 그 공포의 사슬에 계속 묶여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현대 사회는 공포를 어떤 방식으로든 조장하고 확산시켜서 사람들을 조종하고 통제 가능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사회에는 페니와이즈와 같은 익명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허공을 떠돌며 계속 우리를 지배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 만들어 놓은, 그래서 스스로 덫에 걸려 있는 공포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공포의 실체를 올바로 인식하고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스티븐 킹의 원작이, 안드레이 무시에티의 영화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 찾아진다.  


영화 &#39;그것 : 두 번째 이야기&#39;

역설적으로 영화 <그것 : 두 번째 이야기>는 공포라는 것, 그 자체가 어떻게 조장되고 또 어떻게 이용 되느냐에 따라 인간을 영혼부터 육체까지 완전히 쥐고 흔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친구 중 한 명인 스탠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듯이. 세상이 들끓을 때마다 이유 없는 공포와 대상이 불분명한 적대감이 사람들 사이에 흘러 넘치는 것도 주의 깊게 살펴 볼 일이다. 영화는 ‘그것’, 공포에 굴복하거나 도망치지 말고 ‘극중의 아이들=다 큰 주인공들’처럼 끝까지 싸우라고 권한다. 광대 페니와이즈를 죽이는 길은 페니와이즈를 칼로 찌르거나 숨통을 막거나 하는, 물리적인 방법이 아니다. 주인공들이 페니와이즈가 더 이상 무섭지 않다, 나는 네가 더 이상 무섭지 않다고 외칠 때이다. 공포는 심리이고 따라서 마음으로 극복해야 한다. 특히 이들 친구들처럼 연대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영화 초반부에 유명 감독 자비에 돌란이 작은 역을 맡아 나온다. 원작자인 스티븐 킹도 카메오 이상의 단역으로 나온다. 킹이 등장하는 모습을 만나 보게 되는 것도 흥미롭다. 안드레이 무시에티는 스티븐 킹에게 오마쥬를 바치기 위해 영화로 만들어진 그의 작품 중에서 일부 장면들을 슬쩍슬쩍 끼워 넣기도 한다. 예컨대 <샤이닝>에서 잭 니콜슨이 화장실 문을 도끼로 때려 부수며 아이들을 죽이려 하는 장면 같은 것. 스티븐 킹 작품 전반에 대한 레퍼런스, 그로 인해 영향을 받은 미국 현대 공포영화에 대한 언급이 넘쳐 나는 작품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영화 한 편이 스티븐 킹의 작품들, 혹은 영화들을 한번에 뗄 수 있는 종합판과 같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