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1800쪽에 달하는 스티븐 킹의 역작 중의 역작이자 대하 공포판타지 소설인 <그것, It>을 영화로 만드는 것에는 ‘감히’ 혹은 ‘설마’ 또는 ‘불가능한’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마련이었다. 그건 마치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영화로 만드는 일과 같은 것으로 간주됐다. 영화 <반지의 제왕>이라는 위업은 피터 잭슨이 달성했다. 그러나 피터 잭슨은 사전에 검증이 여러 차례 이루어진 감독이었다.
그에 비하면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이 작품의 영화화를 아르헨티나 출신의, 비교적 ‘듣보잡’인 40대 신예 감독이 만들어 내리라고는 그 누구도 쉽게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원작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현 시대와 문화에 대한 레퍼런스를 가득 담은 작품으로 말이다.
안드레이 무시에티 감독은 2017년 영화 <그것>에 이어 속편인 <그것 : 두 번째 이야기, It Chater Two>까지 섭렵함으로써 스티븐 킹의 문학을 영화로 완결해 내는 데 성공했다. 무시에티는 길예르모 델 토로가 제작을 맡은 공포영화 <마마>의 연출로 언젠가 큰 사고를 칠 감독으로 점쳐져 왔다(엄마 귀신이 아이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애들을 죽음의 세계로 데려 가려 하지만 그 아이들을 사랑하게 된 계모가 이를 막아 서자 결국 한 아이는 두고 한 아이만 데려 간다는 내용의, 모성애를 공포의 설정으로 삼은 특이한 작품. 가장 슬프면서도 가장 무서운 엄마 귀신 이야기였던 셈이다). 다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을 뿐이다. 특히 이번 속편은 169분이라는 길고 긴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하는, 진부한 표현을 빌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보게 만들 만큼, 공포와 재미의 롤러코스터를 오르내리게 만든다. 오랜만에 만나는 공포 판타지의 수작이다.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다는 것은 실로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오동진의 라스트필름 5.
(오동진 평론가의 영화 에세이)
문제는 그걸 아는 것과 그걸 없애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대개 근원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데 ‘그것’을 대체 누가 만들었으며, 어디서부터 왔으며 또 궁극적으로 그것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 간다. 그렇게 공포에 굴복하는 삶을 선택하고 만다.
27년 전 사건은 주인공 격인 빌(제임스 맥어보이)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동생을 혼자 놀러 보냈고 이 동생이 하수구 급류에 휩쓸려 익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빌과 친구들은 ‘페니와이즈’라 불리는 광대가 동생을 꼬드겨 죽음에 이르게 했음을 알게 된다. 광대 외모의 페니와이즈는 이때부터 이들의 주변을 떠돌며 살인을 저지르고 기괴한 일들을 자행해 아이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27년 전 아이들은 페니와이즈를 떠나게 하는 데까지는(죽이지는 못하고) 간신히 성공하지만 만약 다시 ‘그것’이 돌아 오면 함께 모여 또 한번 힘을 합치자고 서약한다. 그리고 27년이 지나 데리 마을에 또 한번 이유 모를 과도한 폭력과 살인이 이어지게 되면서 친구들은 어릴 적 사건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고향 땅을 지키던 마이크로부터 다들 서약을 지키라는 통보를 받는다.
모두들 어린 시절의 공포가 떠올라 돌아오기까지 전전긍긍한다. 이 과정에서 스탠리는 자살을 하고 나머지 다섯 명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이크 앞에 모여 든다. 그리고 무지막지한 공포에 떨면서도 페니와이즈와의 일대 혈전을 준비해 나간다. 이제 성인이 된 어릴 적 친구들은 과연 ‘페니와이즈=유년 시절의 공포’와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영화는 공포와 드라마, 판타지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사람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기 시작한다.
주인공들 개개인이 숙명처럼 지니고 있던 공포심과 그 형상(광대가 흉측한 이빨을 드러 내고 아이들을 잡아먹는 장면 같은 것, 목이 잘린 시체가 움직이고, 좁은 화장실 안이 피바다로 차오르는 것 등등)에서 벗어나 바야흐로 진짜 어른, 성인이 돼 가는 과정이 남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우리 역시 스스로가 갖고 있는 공포심, 내 안의 공포에서 제대로 벗어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 공포는 단순하게 각자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악몽이나 특별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사회화의 과정에서 누구나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게 되는 무엇일까. 사람이 성장하고 그럼으로써 사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오히려 그 공포의 사슬에 계속 묶여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현대 사회는 공포를 어떤 방식으로든 조장하고 확산시켜서 사람들을 조종하고 통제 가능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사회에는 페니와이즈와 같은 익명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허공을 떠돌며 계속 우리를 지배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 만들어 놓은, 그래서 스스로 덫에 걸려 있는 공포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공포의 실체를 올바로 인식하고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스티븐 킹의 원작이, 안드레이 무시에티의 영화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 찾아진다.
영화 초반부에 유명 감독 자비에 돌란이 작은 역을 맡아 나온다. 원작자인 스티븐 킹도 카메오 이상의 단역으로 나온다. 킹이 등장하는 모습을 만나 보게 되는 것도 흥미롭다. 안드레이 무시에티는 스티븐 킹에게 오마쥬를 바치기 위해 영화로 만들어진 그의 작품 중에서 일부 장면들을 슬쩍슬쩍 끼워 넣기도 한다. 예컨대 <샤이닝>에서 잭 니콜슨이 화장실 문을 도끼로 때려 부수며 아이들을 죽이려 하는 장면 같은 것. 스티븐 킹 작품 전반에 대한 레퍼런스, 그로 인해 영향을 받은 미국 현대 공포영화에 대한 언급이 넘쳐 나는 작품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영화 한 편이 스티븐 킹의 작품들, 혹은 영화들을 한번에 뗄 수 있는 종합판과 같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