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장기화 접어든 남북경색…대북 메시지 신중 기해야

중앙일보

입력 2019.09.06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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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자극한 대통령과 참모진의 말말말

지난해 3차례 정상회담을 하며 달아올랐던 남북관계가 올들어 6개월 넘게 대화가 끊기면서 위기 상황을 맞았다. 지난달 15일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74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경축사를 한 문재인 대통령. [뉴시스]

꼬여버린 남북관계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2월 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사태를 기점으로 잡으면 6개월 넘게 경색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칫 남북 대화와 교류·협력의 공백이 장기화로 접어드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해 4월과 5월 잇달아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고, 9월에는 평양에서 9·19 공동선언이 체결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 국민과 국제사회를 향해 적대관계의 종식과 한반도 평화를 말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은 올해 들어서 9차례에 걸쳐 18발이 릴레이식으로 쏘아 올려졌고, 대남 비방과 위협의 선봉에 김정은이 자리하고 있다.
 
남북 정상 간 소통도 끊겨 서울~평양 핫라인에 대해 “전화는 개설이 됐는데 북측에서 응하지 않고 있다”(8월 6일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 국회 답변)는 말이 나올 정도다. 오는 19일 평양선언 1주년을 맞게 되지만 공동행사는커녕 남측의 단독 이벤트도 제대로 치러지기 힘든 상황에 처했다. 정부는 내달 15일 평양에서 열릴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에서의 남북전을 기다리는 처지다. 당장 쾌도난마식의 남북 관계 복원은 쉽지 않아 보인다. 당분간 북한의 도발과 비난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국면 전환의 전략과 시점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8?15 경축사 ‘2045년 통일’ 발언
북, 흡수통일 여겨 거부감 보인 듯
할 말 하되 불필요한 자극 피해야
대북 전문·전략통 기용 폭 넓혀야

평양발 대남 비방 메시지가 심각한 지경이란 판단이 우리 정부 안팎에서 나온 건 문재인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 북한이 비방 공세를 펼치면서다. 북측이 ‘국가 기구’로 내세우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기다렸다는 듯 “남조선 당국자들과 더 이상 할 말도 없으며 다시 마주 앉을 생각도 없다”고 밝혔다. “북남 대화의 동력이 상실된 것은 전적으로 남조선 당국자의 자행(恣行, 제멋대로 건방지게 행동함)의 산물이며 자업자득”이라고 화살을 문 대통령에게 겨눴다. 평화경제를 제안한 대목과 관련해서는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 운운하며 남북 정상회담 카운터파트에 대한 금도를 넘어섰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소형 선박을 타고 신형 방사포 시험 발사장으로 향하는 모습으로 관영 조선중앙통신이 지난달 25일 공개했다. [연합뉴스]

통일부가 “남북 합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북관계 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공식 입장을 낸 건 그대로 두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렇지만 북한의 공세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지난 3일엔 조평통이 운영하는 비방·선동 전담 사이트 ‘우리민족끼리’를 내세워 “남조선 당국자들과 다시 마주 앉을 생각이 없다”고 강조했다. 통일부를 향해선 “대화 타령을 하고 있다”고 몰아세웠다.
 
북한의 대남 대립각 세우기는 말로 그치는 게 아니다. 한때 남북 당국 간 소통 채널로 내세워졌던 개성 공동연락사무소는 개점휴업 상태다. 지난해 9월 문을 연 이후 매주 금요일 남북 간에 차관급 연락사무소장 만남이 이어졌지만 3월부터 중단된 상태다. 이번 주에는 북측이 불참을 통보해옴에 따라 서호 통일부 차관이 아예 개성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사무소 개설을 위해 국민 세금을 투입하고, 대북제재 위반 논란까지 겪으며 물자와 인력을 투입했지만 몇 달 쓰지 못하고 흐지부지된 상태다.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나선 미사일 시험발사 공세는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성과를 퇴색시켰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눈 밖에 나지 않을 수준의 발사체를 골라 도발 행보를 이어간 김정은이 현장에서 잇달아 대남 위협발언을 쏟아낸 때문이다. 마치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장거리 발사체를 쏘면서 한반도를 일촉즉발의 긴장으로 몰고 간 2017년 상황으로 돌아간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다.
 
문 대통령과 우리 정부를 극렬하게 비난하고 나선 김정은의 셈법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8월 한·미 합동 군사연습이나 F-35A 스텔스 전투기 도입에 따른 불만이란 관측이 있었지만 훈련이 끝난 지난달 20일 이후에도 도발은 이어졌다. 대화의 전제조건을 슬그머니 거둬들이고 회담 테이블로 나오던 과거 패턴도 기대하기 힘든 국면이다. 6월 말 판문점에서 이뤄진 김정은-트럼프 회동의 후속조치로 북·미 실무협상이 추진 중인 상황이라 남북관계를 후순위로 미룬 것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거칠어진 ‘문재인 때리기’의 배경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김정은이 지난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문 대통령을 “오지랖 넓은 중재자”라고 비난한 뒤 한국 정부의 북·미 관계 역할론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대목도 호둣속 같다.
 

지난달 16일 ‘북한판 에이태킴스’로 불리는 단거리 탄도미사일의 시험 발사 장면. [연합뉴스]

이런 상황 속에서 청와대와 정부 부처가 내놓는 대북 메시지가 보다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북한이 몽니를 넘어선 수준의 대남 비방을 쏟아내는 민감한 국면에 불필요한 자극이나 요구는 역효과를 낼 것이란 측면에서다. 할 말은 하고 짚을 것은 짚는 당당한 자세도 필요하지만 실속 없이 상대측에 빌미만 주는 건 곤란하다는 차원에서다.
 
대표적 사안이 김정은의 서울 답방 문제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9·19 평양 공동선언에서 남한 방문을 약속했다. 문 대통령은 당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연내”라고 시한까지 공개했다. 하지만 해를 넘겨버렸다. 청와대는 지난해 말 ‘연내 김정은 방문’이 성사될 것처럼 분위기를 띄웠다가 불발되는 해프닝도 벌였다. 합의 이행을 하지 않은 북한의 책임이 크지만, 김정은으로서는 이를 서울 방문을 압박하는 모양새로 받아들였을 공산이 크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최근 공개 연설이나 외신 인터뷰 등을 통해 11월 부산 한-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특별 정상회담에 참석해줄 것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손기웅 전 통일연구원장은 “김정은에게는 첫 남한 방문인 데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다자 정상회담이란 이중부담이 갈 수 있는 자리라 쉽지 않은 선택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과 아세안의 관계설정 30주년을 기념한 부산 행사에는 아세안 10개국 정상이 참여한다.
 
북한이 반발한 대통령 8·15 경축사에 일부 문제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체적 기조는 문재인 정부의 평화경제나 ‘통일로 하나된 나라’(One Korea) 구상을 담고 있지만, 각론이나 표현에선 북한을 쓸데없이 자극할 요소가 담겨있다는 얘기다. 문 대통령은 경축사 앞부분에 “회령(함북)에서 자란 소년이 부산에서 해양대를 졸업하고 아세안과 인도양, 남미의 칠레까지 컨테이너를 실은 배의 항해사가 되는 나라”를 제시했지만 북한 입장에선 듣기 거북한 스토리일 수 있다. 특히 ‘2045년 광복 100주년’을 통일의 시점으로 설정하고, 통일된 2050년 국민소득 7~8만 달러를 강조한 대목도 북한으로선 흡수통일 논리로 받아들일 공산이 크다. 통일부 전직 고위 간부는 “마치 이명박 정부 시절 ‘747 공약’(7년 내에 7% 성장으로 국민소득 4만 달러 달성)을 북한·통일 이슈에 적용한 것 같아 당혹스러웠다”고 말했다.
 
사실상 무산된 대북 쌀 지원 문제도 통일부와 관련 부처가 고민해봐야 할 사안이다. 2012년 집권한 김정은이 “남조선 것 받지 말라”며 대북지원 식량과 의약품·분유 등에 거부감을 보인 정황을 감안해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수성향의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주는 것은 안 받아도 우리 진보 진영이 주는 건 수용할 것”이란 잘못된 정책 판단이 결국 식량지원 퇴짜 사태를 불렀다는 것이다. 정부는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중국이 80만t 규모로 알려진 대규모 대북지원을 추진한다는 대목도 고려했어야 한다.
 
남북관계의 경색 국면에 전략적으로 대처한다는 차원에서 청와대와 정부의 대북·안보 참모진이 대통령과 정부 안팎의 북한 관련 메시지를 면밀히 조율할 필요가 있다. 중구난방식 발언이 사태를 꼬이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북한의 반발에도 이낙연 총리가 “남북미 대화 궤도가 유지되고 있다. 한국 정부는 북·미 대화를 도우며 쉬지 않고 나갈 것”(5일 서울안보대화 축사)이라 밝히고,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차관급)은 “한국 정부가 미국을 설득시켜주길 바라는 (북한의) 속내가 있다”며 ‘중재자’ 역할을 자꾸 역설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북한을 제대로 알고, 대화 테이블로 끌어낼 수완과 지략을 가진 정책통과 전문가 그룹의 기용 폭을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