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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코리아] 광화문 현판뿐 아니라 글씨도 바꿔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2019.09.03 00:13

수정 2019.09.03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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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 성균관대 명예교수

문화재청이 광화문 현판을 교체한다고 최근 발표했다. 현판이 현재 흰색인데 고증 결과 검정색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전에 교체할 땐 고증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꼴인데, 필자가 보기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새로 건지 얼마 안 되는데 현판에 사용한 나무가 갈라져서 언제 반 토막이 날지 몰라 현판 교체가 불가피하게 된 게 실제 이유라고 본다. 나무가 갈라지는 건 원래 사용하려던 품질 좋은 금강송을 누군가 바꿔 쳐서 불량품을 쓴 탓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이번에 제대로 된 나무를 사용해 현판을 바꾼다 해도 머지않은 장래에 또다시 교체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 것이다. 현판의 색깔보다 더 중요한 건 현판 글씨, 즉 ‘광화문’ 글씨인데 이걸 놔두고 바꿔서이다. 현재 글씨는 서예의 관점에서 볼 때 글씨가 아니라 그림일 뿐이다. 단순 복원하는 데 집착한 나머지 희미한 사진에 기초해서 비슷하게 그려서다. 이런 식의 복원이라면 복원의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서예의 기운과 생동감을 제대로 살려낼 수 없다. 그러니 현판만 교체하는 건 잘못된 글씨를 그대로 둔 채 액자만 바꾸는 격이다.

현재 글씨는 사진에 기초한 그림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글씨 돼야

광화문 현판 글씨에 우리가 공을 들여야 하는 건 대문의 현판 글씨가 건축물의 화룡점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은 담으로 막혀, 건물 안을 들여다볼 수 없어 대문의 현판 글씨를 보고 건물주의 의식이나 문화 수준을 가늠했다. 그래서 건물주는 대문 현판 글씨에 많은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 하물며 광화문은 궁궐 대문인데 어찌 소홀할 수 있겠는가?
 
광화문의 뜻을 풀이하면 빛(光)으로 화해(化) 만백성에게 혜택을 가져다준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빛으로 화할까? 그건 경복(景福), 즉 큰 복이다. 그러니 왕의 교지가 광화문을 나서는 순간 ‘사방에 널리 퍼져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光被四表 化及萬邦)’ 는 뜻이다.
 
참고로 창덕궁 대문 이름은 돈화문인데 아름다운(昌) 덕(德)이 도탑게(敦) 화한다는(化) 의미이다. 즉 왕의 교지가 오랫동안 만백성에게 혜택을 가져다준다는 뜻이다. 또 창경궁 대문 이름은 홍화문인데 창성하는(昌) 경사(慶)가 넓게(弘) 화한다는 의미이다. 즉 삼천리 방방곡곡에 혜택이 베풀어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경희궁 대문 이름은 흥화문인데 경사스런(慶) 기쁨(熙)을 일으키게(興) 한다는 의미이다. 즉 왕의 교지를 기다렸다는 듯 백성이 반갑게 맞이한다는 뜻이다.


이런 좋은 의미를 전달하는 글씨가 빼어나야 하는 건 당연하다.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와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받기 위해, 이들을 정치적으로 불우하게 빠뜨렸던 당시 힘깨나 썼던 사람들조차 애썼던 건 이런 이유이다. 이 정도 서예가의 글씨를 대문에 걸어 놓아야 세간의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 광화문의 현판 나무보다 현판 글씨가 더 중요하다. 게다가 광화문 현판 글씨는 경복궁 전체 건축물의 화룡점정을 넘어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는 얼굴에 해당한다. 전 세계 어느 나라의 궁궐 대문에 광화·돈화·홍화·흥화라고 하는 빼어난 이름을 지닌 데가 어디 있는가? 이런 수준 높은 의미를 지닌 글씨가 함량 미달이라면 이는 대한민국의 국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애플의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 그 디자인에 세상 사람들이 놀랐다. 스티브 잡스가 공을 들인 탓인데 그의 디자인 개념은 대학 시절 잠시 익혔던 서예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예란 직선과 곡선의 절묘한 조화로 이루어지는 예술인데 잡스는 아이폰 디자인을 통해 그 조화를 이뤄냈다. 이렇게 보면 광화문 글씨는 예술 차원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문화 수준을 높여 산업경쟁력까지 견인할 수 있다.
 
김정탁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