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희철의 졸음쉼터

[문희철의 졸음쉼터] 살짝 긁은 차가 하필 페라리라면

중앙일보

입력 2019.09.02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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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철 산업1팀 기자

지난달 22일 독일에서 8세 소년이 폴크스바겐 골프를 몰고 시속 140㎞로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4월엔 경기도 화성에서 10살 초등학생이 현대차 그랜저를 몰고 도주하다 차량 8대를 파손했다. 지난해 7월엔 대전에서 9세 어린이가 현대차 아반떼를 몰고 7㎞ 거리를 왕복하며 주차장·마트에서 차량 10대를 긁었다.
 
한때는 세상이 두렵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넘어설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으로 가득하던 시절. 그 땐 실수를 하더라도 만회할 시간이 충분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신호대기 중에 옆 차선 운전자가 깜짝 놀라서 ‘내리라!’고 소리쳤더니, 이 담대한 9살 어린이는 당돌하게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창문을 닫고 급가속을 했다는 증언이 나온다. 아마도 ‘부웅’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서 ‘형씨만 운전하는 거 아니야. 동생이 보여줄게’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다들 못 한다고 말할 때 한 방 먹여주고 싶은 치기어린 생각이 지배하는 시기가 있다. 나이가 적다고 경험이 없다고 못하는 게 아니라는 걸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시절. 경찰이 아반떼 블랙박스를 확인했더니, 이 어린이는 비록 운전면허증이 없지만 교통신호를 거의 위반하지 않고 대형마트에 다녀왔다. 독일 소년도 갓길에 비상등을 켜두고 후방에 삼각대까지 설치한 채 경찰을 기다렸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요즘 운전게임은 생생한 주행환경을 구현한다. 속도·마찰·하중 등 실제 차량 운행 정보를 시뮬레이션한 덕분이다. 자신감을 얻은 어린이가 ‘나도 운전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임은 초기화 버튼을 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교통사고는 초기화 버튼이 없다. 세상에 책임지는 게 불가능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행동반경이 달라진다. 미성년자 사고는 통상 보험 처리가 안 된다. 만약 빠듯한 부모님 월급으로 겨우 가계를 꾸리고 있다면. 긁어먹은 차량 중 1대가 롤스로이스나 페라리라면. 누군가 다치거나 사망했다면. 그때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은 계기반 주행거리처럼 버튼 하나 누른다고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문희철 산업1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