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요놈 봐라.
쌓아놓은 바랭이 더미를 치우는데 쥐 두 마리가 뽈뽈 기어 나온다. 엄지손가락 반만 하다. 세상 구경한 지 얼마 안 된 아기 등줄쥐다. 배가 볼록하니 젖을 제대로 먹고 자란 티가 난다. 놈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 이게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냐 싶겠다. 거실에서 TV로 ‘헤이 지니’ 보며 노는데 지붕이 날아간 꼴이니 말이다. 도망은 가야겠는데 내리꽂는 햇살 때문에 눈부시고, 동서남북 구분도 안 되고, 인정사정없게 생긴 아저씨가 쇠스랑을 들고 내려다보고 있으니 환장할 테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 둘이 거의 동시에 몇 가닥 남은 풀줄기에 머리를 처박는다. 코와 눈만 겨우 숨긴 꼴이 딱 ‘눈 가리고 아웅’이다.
한 놈의 엉덩이를 툭툭 쳤더니 정신없이 내뺀다. 다른 놈을 체포해서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허 이놈 관상 보게. 콩알만 한 눈이 오닉스보다 까맣고, 갓 나온 털은 윤기가 좌르르 하고, 손발 바닥이 선홍색에다 쭉 뻗은 꼬리가 제 몸보다 길다. 딱 보아 크게 될 상인데 마빡에 액이 끼어있는 걸 보니 서생 초년 운이 문제다. 꼬물꼬물하는 놈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내려놓으니 들깨밭 속으로 허겁지겁 들어간다. 야 이놈아, 아무리 급해도 인사는 하고 가야지. 귀인 만나 횡액 수 면했으니 부모님 말씀 새겨듣고 자나 깨나 글을 읽어 나라 구할 인재가 되어라.
유아 유기 현장을 찬찬히 살펴보니 그게 아니다. 부모가 현명하구나. 여기서 몸을 풀고 애들을 기르는 이유가 있다. 은폐엄폐가 쉽고 무엇보다 식량 현장조달이 가능하다. 풀 더미 아래에는 얼마 전에 낫으로 쳐내 던져놓은 옥수수 대공들이 깔려있다. 그 사이사이에 이빨 빠져 거두지 않은 옥수수가 달려있다. 게다가 지렁이나 굼벵이 같은 간식거리 충분하지, 비 와도 걱정 없지, 밤에 따뜻하니 천하명당 아닌가.
쥐 구경을 하다가 밭을 마저 정리하고 허리를 폈다. 사방 가득한 녹색에 현기증이 인다. 8월 말의 산하는 푸르다 못해 검다. 시인 서정주는 ‘여기저기 저 가을 끝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라고 노래했다. 녹색이 선을 넘으면 초록 청록이 되고 마침내 흑녹이 된다. 절정과 쇠락의 경계선에 흑녹이 있다. 아래는 시인 이상이 쓴 수필 『권태』의 일부다.
나는 그 물가에 앉는다. 앉아서 자- 무슨 제목으로 나는 사색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물론 아무런 제목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생각 말기로 하자. 그저 한량없이 넓은 초록색 벌판, 지평선, 아무리 변화하여 보았댔자 결국 치열한 곡예의 역을 벗어나지 않는 구름, 이런 것을 건너다본다.
지구 표면적의 백분의 구십구가 이 공포의 초록색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조무미한 채색이라. 도회에는 초록이 드물다. 나는 처음 여기 표착하였을 때 이 신선한 초록빛에 놀랐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닷새가 못 되어서 이 일망무제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작정으로 저렇게 퍼러냐, 하루 온종일 저 푸른빛은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다.
시골살이 며칠 만에 시인은 녹색 바다에 질렸다.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 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 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먹었노?
놀라고 사랑한 생명의 색깔이 하루아침에 지루함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눈을 감지 않는 다음에야 피할 수 없는 초록에 시인은 공포까지 느낀다. 감정 과잉이 부른 엄살이지만 그 무료한 하루가 눈에 선하다. 시인의 권태에는 그러나 땀내가 없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최 서방 조카를 깨워 장기를 두고, 교미하는 개를 구경하고, 웅덩이 앞에서 생각에 잠기고, 노는 아이들을 보며 지겨워할 뿐이다.
초록 속으로 팔 걷고 들어가 꼴 베고, 피 뽑고, 고추를 따야 하는 노동의 일상에 권태는 사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