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충기의 삽질일기] 새끼 쥐 두 마리 처치 방법

중앙일보

입력 2019.08.31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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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가 청포도가 살이 오를대로 올랐다. 한 알 따서 깨무니 새콤달콤한 즙이 터지며 침샘이 화들짝 열린다.

 
아니 요놈 봐라.  

쌓아놓은 바랭이 더미를 치우는데 쥐 두 마리가 뽈뽈 기어 나온다. 엄지손가락 반만 하다. 세상 구경한 지 얼마 안 된 아기 등줄쥐다. 배가 볼록하니 젖을 제대로 먹고 자란 티가 난다. 놈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 이게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냐 싶겠다. 거실에서 TV로 ‘헤이 지니’ 보며 노는데 지붕이 날아간 꼴이니 말이다. 도망은 가야겠는데 내리꽂는 햇살 때문에 눈부시고, 동서남북 구분도 안 되고, 인정사정없게 생긴 아저씨가 쇠스랑을 들고 내려다보고 있으니 환장할 테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 둘이 거의 동시에 몇 가닥 남은 풀줄기에 머리를 처박는다. 코와 눈만 겨우 숨긴 꼴이 딱 ‘눈 가리고 아웅’이다.  
한 놈의 엉덩이를 툭툭 쳤더니 정신없이 내뺀다. 다른 놈을 체포해서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허 이놈 관상 보게. 콩알만 한 눈이 오닉스보다 까맣고, 갓 나온 털은 윤기가 좌르르 하고, 손발 바닥이 선홍색에다 쭉 뻗은 꼬리가 제 몸보다 길다. 딱 보아 크게 될 상인데 마빡에 액이 끼어있는 걸 보니 서생 초년 운이 문제다. 꼬물꼬물하는 놈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내려놓으니 들깨밭 속으로 허겁지겁 들어간다. 야 이놈아, 아무리 급해도 인사는 하고 가야지. 귀인 만나 횡액 수 면했으니 부모님 말씀 새겨듣고 자나 깨나 글을 읽어 나라 구할 인재가 되어라.                  

쥐 가족이 살림을 차렸던 풀 더미. 나는 졸지에 가정파괴범이 됐다. 무기징역감이다.

그런데 형제자매들은 왜 없지? 쥐는 한배에 새끼 열 마리 정도를 낳는데? 부모는 또 어디로 가고? 갓난애 버리고 가출한 비정 부모, 이거 대중의 공분을 불러일으킬 기삿감이네….
유아 유기 현장을 찬찬히 살펴보니 그게 아니다. 부모가 현명하구나. 여기서 몸을 풀고 애들을 기르는 이유가 있다. 은폐엄폐가 쉽고 무엇보다 식량 현장조달이 가능하다. 풀 더미 아래에는 얼마 전에 낫으로 쳐내 던져놓은 옥수수 대공들이 깔려있다. 그 사이사이에 이빨 빠져 거두지 않은 옥수수가 달려있다. 게다가 지렁이나 굼벵이 같은 간식거리 충분하지, 비 와도 걱정 없지, 밤에 따뜻하니 천하명당 아닌가.  

새끼 쥐의 숨바꼭질. 눈코만 파묻고 나 찾아봐라~.

이런 보금자리에 쇠스랑이 푹 들어왔으니 난데없는 천재지변이다. 젖 먹이던 엄마가 먼저 비상상태를 감지했겠지. 숨죽이며 바깥을 살피다가 애들 볼기짝을 때려 풀숲으로 보냈을 테다. 아이 둘이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었겠지. 엄마가 잡히면 나머지도 고아 되니 눈물을 머금고 철수, 그래도 승률 80%가 어디냐고 위안 삼으며. 결국 나머지 둘까지 생환했으니 운수대통한 날 아닌가. 이나 저나 이웃에 마실 다녀온 아버지 표정이 궁금하다. 집과 식구들이 몽땅 사라졌으니 넋이 나갈지, 새장가 핑계 생겼다고 만세를 부를지.              

녹색에도 나이가 있다. 연두는 젖먹이, 신록은 어린이, 초록은 청춘이다. 장년의 청록을 지나면 노년의 흑록이 되고 마침내 녹색 임무는 끝난다. 같은 나이의 녹색이라도 시시각각 달라진다. 해 뜰 무렵과 해 뜨고 나서, 한낮과 해질 녘이 다르다. 맑은 날과 흐린 날과 비 오는 날이 다르다. 같은 산이라도 동서가 다르고, 같은 시간이라도 계곡과 등성이가, 같은 나무라도 위아래가 다르다. 녹색 하나에도 셀 수 없는 층위와 구분하기 힘든 스펙트럼이 있다. 얘는 파랑 쟤는 빨강,... 이쪽은 깜장, 저쪽은 하양... 내 밭에는 이분법이 없다.

 
쥐 구경을 하다가 밭을 마저 정리하고 허리를 폈다. 사방 가득한 녹색에 현기증이 인다. 8월 말의 산하는 푸르다 못해 검다. 시인 서정주는 ‘여기저기 저 가을 끝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라고 노래했다. 녹색이 선을 넘으면 초록 청록이 되고 마침내 흑녹이 된다. 절정과 쇠락의 경계선에 흑녹이 있다. 아래는 시인 이상이 쓴 수필 『권태』의 일부다.  
 
나는 그 물가에 앉는다. 앉아서 자- 무슨 제목으로 나는 사색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물론 아무런 제목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생각 말기로 하자. 그저 한량없이 넓은 초록색 벌판, 지평선, 아무리 변화하여 보았댔자 결국 치열한 곡예의 역을 벗어나지 않는 구름, 이런 것을 건너다본다.
지구 표면적의 백분의 구십구가 이 공포의 초록색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조무미한 채색이라. 도회에는 초록이 드물다. 나는 처음 여기 표착하였을 때 이 신선한 초록빛에 놀랐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닷새가 못 되어서 이 일망무제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작정으로 저렇게 퍼러냐, 하루 온종일 저 푸른빛은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다.
 
시골살이 며칠 만에 시인은 녹색 바다에 질렸다.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 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 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먹었노?
 
놀라고 사랑한 생명의 색깔이 하루아침에 지루함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눈을 감지 않는 다음에야 피할 수 없는 초록에 시인은 공포까지 느낀다. 감정 과잉이 부른 엄살이지만 그 무료한 하루가 눈에 선하다. 시인의 권태에는 그러나 땀내가 없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최 서방 조카를 깨워 장기를 두고, 교미하는 개를 구경하고, 웅덩이 앞에서 생각에 잠기고, 노는 아이들을 보며 지겨워할 뿐이다.  
초록 속으로 팔 걷고 들어가 꼴 베고, 피 뽑고, 고추를 따야 하는 노동의 일상에 권태는 사치다.

고추 지지대 끝에서 자라는 바랭이. 파이프 안에 조금 있는 흙에 뿌리를 내렸다. 무서운 놈, 놀라운 놈.

토마토 줄기가 말라간다. 저 뒤에 보이는 무성한 작물은 쥔장네 토란. 토란은 추석에 먹을 수 있지만 생강은 김장철이 돼야 거둔다.

무 배추 심을 자리를 마련하느라 토마토 줄기를 걷어내니 알록달록. 터지고...썩고...떨어지고...달린 토마토의 절반이나 먹었을까.

 

늙어서도 목 빳빳하게 세우고 삿대질 하고 다니면 꼰대야. 고개 숙여가는 해바라기, 들어보니 묵직하다.

농사 동무 최 씨 아재가 아침 일찍 나와 고추밭을 털어내고 상추 모종 7판, 210개를 혼자 심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허리를 굽히지 못하고 엉금엉금.

최 씨 아재가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10분도 안 돼 철가방 도착. 아점을 하고 나온 나는 짜장면 곱빼기를 먹을 자신이 없어 최 씨 아재 짬뽕에 얹어주었다. 배고파 죽겠다던 아재, 아이고 배 불러라 너무 많이 시켰나봐... 막걸리는 쥔장네 냉장고에서 꺼내왔다.

밭으로 나갈 날을 기다리는 김장 모종. 고라니가 숲속에서 입맛을 다시고 있을 텐데, 조심해라 걸리면 너는 죽고 나는 살고. 하여튼 끝장을 볼 거다.

며느리도 주지 않는다는 가을 상추. 장마 전에 씨 뿌려 이만큼 자랐다. 그나저나 며느리가 무슨 죄, 나 같으면 며느리 먼저 주겠다.

글·사진=안충기 아트전문기자 newnew9@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