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플·AP→해외 봉사→소논문→교내상…대입 스펙의 변천사

중앙일보

입력 2019.08.26 05:00

수정 2019.08.26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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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일요일인 25일 서울 종로구 적선현대빌딩에 꾸려진 인사청문회 준비단 사무실로 출근해 자녀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딸 조모(28)씨는 2010년 입학사정관제(현 학생부종합전형)를 통해 고려대에 합격했다. 2008학년도 대입에 처음 도입된 이 제도는 객관식 시험으로 학생을 줄 세우지 않고 다양한 가능성을 보고 뽑자는 취지로 도입됐다. 하지만 금세 학생, 학부모의 '스펙 경쟁'으로 치달으면 도입 취지와는 반대로 '금수저 전형'이란 비판을 받게 됐다. 대학의 입학 전형, 교육 당국의 규제에 따라 시기마다 달라진 대입 스펙의 변천사를 돌아봤다.    
 

입학사정관제 초기 토플·AP 등 '특목고 맞춤 스펙' 유행

 
입학사정관제 도입 초기엔 토플, 토익 등 공인어학자격증이 기본적인 스펙이 됐다. 이는 조씨의 사례에서 보듯 일부 대학이 입학사정관제를 외고 등 특목고 학생을 뽑는 통로로 활용했던 것과 연관이 있다. 

2008년 대입에 입학사정관제 도입, 2015년 학종으로 변화
초기 어학 성적, 국제올림피아드 같은 학교 밖 실적 중심
교육당국 규제 받자 교내 대회, 학내 동아리 등 각광 받아

조씨는 2010대입에서 고려대의 '세계선도인재전형'에 합격했다. 고려대는 총 정원 3772명 중 23.5%(886명)을 입학사정관제로 선발했는데, 이중 200명을 이 전형으로 뽑았다. 지원 자격은 토플·텝스 성적을 제출하거나 AP(해외대학 학점선이수제) 3과목의 성적을 제출하거나 2개 이상 공인 제2 외국어 성적을 제출한 학생에 한한다. 
 
일반고에서 수능과 내신에 집중했던 학생들은 갖추기 힘든 스펙이다. 대학가에선 "외국어고 등 특목고 졸업생을 선발하기 위한 전형"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실제로 모집정원 200명 가운데 105명이 외고 출신이었다. 연세대 글로벌리더전형, 서강대 알바트로스전형, 성균관대 글로벌리더전형도 비슷한 지원 자격을 걸었고 정원의 절반을 외고 졸업생으로 채웠다. 
 

봉사·자율활동도 스펙…해비타트, 배낭여행, 단행본 출판

 
조씨는 영어 성적 외에도 의학 논문에 제1 저자로 이름을 올렸고 자기소개서를 통해 이를 과시했다. 또한 다양한 인턴 활동도 했다. 2010년 전후 입학사정관전형 선발 인원이 크게 늘면서, 수험생 사이에 '입학사정관의 눈길을 끄는' 스펙 쌓기 경쟁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는 점과 연관 깊다.


봉사 활동이 강조되면서 서민이나 취약계층을 돕는 해비타트 활동, 음성 꽃동네의 봉사가 유행처럼 번졌다. 봉사 정신을 부각하려고 온 가족의 장기기증 서약서를, 창의적 사고를 입증하는 자료로 에세이집이나 소설책을 출간하고 이를 대학에 제출하는 고등학생들도 늘었다.  
 
서울의 한 일반고 진학부장은 "당시에는 학급회장, 동아리부장처럼 '흔한' 경력보다 해외봉사를 내세우고, 주변 인맥을 동원해 희망 진로에 맞춰 세계적인 소설가나 건축가와 함께 찍은 사진이나 주고받은 e메일 등을 첨부해 제출하는 학생도 있었다"면서 "과열된 분위기 속에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생활 수준이 입시에 고스란히 반영됐다"고 말했다.  
 

지난 5월 충북 청주에서 열린 서울대 진로 진학 학부모 교육 프로그램 현장. 남윤서 기자

학생부 종합전형으로 바뀌면서 대외 활동→교내 R&E·소논문

 
이처럼 스펙 경쟁이 과열로 치닫자 정부의 규제도 이어졌다. 교육부는 2013년 '대입 전형 간소화 및 대입제도 발전 방안'을 내놨다. 입학사정관전형을 학생부종합전형(학종)으로 명칭을 바꾸고, 학생부에는 교내 활동만 기재하고 외부 실적은 적지 못하게 했다. 토플 등 공인어학 성적, AP 등 학교 외 기관의 시험 결과를 기재하면 서류점수를 0점 처리하거나 불합격시킨다는 규정도 만들었다.
  
대입에 반영하는 범위를 고교 내의 활동으로 한정해 학생의 잠재력을 보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학교 간 격차로 인한 불공정 경쟁 시비, 이를 따라잡기 위한 과열 경쟁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과학고·영재학교 등은 교내에 과학 실험과 실습 기자재가 갖춰졌고 석·박사급 교사가 많고, 대학과의 연계 프로그램이 많아 R&E 활동이 활발했다. 활동의 결과물로 소논문을 작성해 학생부나 자기소개서에 기록했다. 
 
이런 소논문이 이공계 최상위권 학생의 대입 스펙으로 소문나자 자사고·일반고에서도 소논문 열풍이 불었다. 하지만 여건이 다른 일반고 학생은 소논문 작성이 쉽지 않았고, 사교육에 의존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이런 문제점이 부각되자 소논문의 대입 반영도 금지된 상태다.  

지난 5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열린 '숙명여고 시험지 유출사건 1심 선고 관련 기자회견'에서 공정사회를 위한 국민모임 회원들이 학생부종합전형(학종)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당국 규제에도 끊이지 않는 스펙 논란…'정시 확대' 목소리 커져

 
학종에 대한 불신이 지속·심화하자, 정부는 매년 학생부 기록 내용을 축소해왔다. 그러자 학생·학부모의 관심은 학교 내 활동 중 학생부 기록이 가능한 교내 경시대회 수상 경력에 쏠리기 시작했다.
 
경쟁이 과열되자 교내상 입상을 위해 부모들이 밤새고 돕는 기현상이 빚어졌다. 상당수 고교가 더 많은 수상자를 내기 위해 교내 대회의 수를 크게 늘렸다. 일부 학교는 상위권 대학에 진학할 가능성이 높은 소수 학생에게 교내 상을 몰아준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지난해 교육부는 2022 대입제도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학생부에 교내 상 수상 내역을 한 학기당 한 개씩으로 제한한 건 이런 부작용을 막기 위함이다.
 
교육당국의 규제가 이어지고 있지만, 대입 스펙 열풍이 완전히 수그러들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이범 교육평론가는 "대입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학생·학부모는 '똘똘한 스펙 하나'에 더 집중할 것이고, 이를 노린 고액 사교육이 팽창할 게 뻔하다"고 말했다. 스펙 기록의 양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불공정 논란을 잠재울 수 없다는 얘기다.
 
학종을 통한 대입에서 부모가 여전히 강력한 변수인 것도 문제다. 숙명여고 교사가 자녀에게 내신시험 문제와 정답을 유출한 정황에 이어, 사회 지도층인 조 후보자의 자녀가 특목고-SKY 대학-의학전문대학원까지 연달아 무시험 합격한 사실이 드러나자 학종에 대한 학생·학부모의 불신은 더욱 커지고 있다. 두 자녀가 학종을 통해 대학에 진학한 서울 강남의 한 학부모는 "학력고사나 수능이 학생의 창의력과 문제 해결력에 도움 되지 않는다며 학종을 옹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처럼 학종을 둘러싼 편법이 끊이지 않는다면 차라리 수능 같은 시험이 낫다고 본다"고 말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