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참전 직전 린뱌오 “전쟁은 총성 파티, 오래 끌수록 좋아”

중앙일보

입력 2019.08.24 00:20

수정 2019.08.24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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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91>

중국을 방문한 판디트를 맞이하는 저우언라이(오른쪽). 왼쪽은 주중 인도대사 파닉카. 1950년 12월 12일, 베이징. [사진 김명호]

1950년 10월 1일, 서울을 탈환한 국군이 38선을 돌파했다. 미군의 38선 통과도 시간문제였다. 함흥교도소에 머물고 있던 김일성은 다급했다. 북한주재 중국대사 니즈량(倪志亮·예지량)을 전화로 불렀다. “현재 38선과 그 이북 지역에는 우리 병력이 없다. 중국 지도자들에게 상황을 전해라.” 조선 노동당 정치국 회의도 소집했다. 소련을 통해 중국에 군사 지원 청하기로 의결했다.
 
10월 2일, 국군의 38선 돌파 이튿날, 마오쩌둥이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냈다. 원문 내용을 그대로 소개한다. “우리는 지원군(志願軍) 명의로 해방군 일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조선 경내에서 미군과 그 주구의 군대를 상대로 작전 펴며 조선 동지들을 지원하겠다. 만일 미군이 전 조선을 점거하면, 조선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미 침략자들의 창궐이 극에 달해 동방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목전의 상황을 우리는 좌시할 수 없다. 10월 15일, 남만주에 주둔 중인 12개 사단을 출동시키겠다. 작전 범위는 38선 지구에 국한하지 않겠다. 적당한 지역에서 38선 이북에 진출한 적과 싸울 생각이다. 초기에는 방어에 주력하고, 소련의 무기가 도달하기를 기다리겠다. 모든 장비가 구비되면 조선 동지들과 연합해 미 침략군을 섬멸시키겠다.”

국군 38선 넘자 수뇌부 참전 회의
“시작은 요란해도 흐지부지 끝나”

연합군·중국군 5차례 전투 끝 대치
넌덜머리 난 미국, 정전 담판 모색

마오, 김일성에게 “소련 가서 협의”
스탈린 “원하는 것 정확히 말하라”

“전쟁 시작 전 흥정 붙여줄 중개인이 중요”


중국지원군 총부 정치부가 발간하던 지원군 기관지. [사진 김명호]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린뱌오(林彪·임표)등과 머리를 맞댔다. 전신(戰神) 린뱌오가 전략가의 면모를 드러냈다. “빠른 시간 내에 미국과 수교하기는 틀렸다. 지연을 감수해야 한다.” 다들 동의하자 계속했다. “누구 말처럼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흥정할 줄 알기 때문이다. 전쟁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다. 시작하기 전에 흥정 붙여줄 중개인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외부세계에 우리의 입장을 전달할 대상을 물색한 후 참전하자. 며칠 전 영국과 인도가 미군의 38선 진출에 반대했다. 네루는 우리에게 호감을 표시한 적이 있다.” 파티 얘기도 곁들였다. “전쟁은 총성이 음악을 대신할 뿐, 파티와 비슷하다. 시작은 요란해도 흐지부지 끝나는 것이 다반사다. 진이 빠질 때까지 오래 끌수록 좋다.”
 
10월 2일 늦은 밤, 주중 인도 대사 파닉카의 침실에 전화벨이 요란했다. 저우언라이의 비서였다. “총리가 급히 만나고 싶어한다.” 3일 새벽 1시, 파닉카를 만난 저우는 평소처럼 정중했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과 중국의 입장을 설명했다. “미국 군대의 38선 돌파가 임박했다. 우리는 전선이 확대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 이 점을 네루 수상에게 보고해주기 바란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인도 정부는 중국의 입장을 미국에 전달했다.
 
중국의 출병은 고려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 역전의 노장들이 둥지를 튼 중공 중앙군사위원회는 미군의 국경 임박을 가정하고 불리한 부분을 점검했다. 압록강 정도는 미군이 도하하려는 맘만 먹으면 장애물 값에 들지도 못했다. 중요한 것은 중국 군대가 한국 경내에서 미군과 효과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느냐였다. 한반도 문제 해결은 그다음이었다. 지원군 명의라도 중국군대였다. 미국에 선전포고했을 경우 중국은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미 공군이 중국의 대도시와 공업단지를 공습하고 해군의 함포가 연해 지역에 불을 뿜을 가능성이 컸다. 중국 공군과 해군은 창건 단계였다. 전투력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중국 중산층의 미국 숭배와 공포증도 큰 문젯거리였다. 정규군이 아닌 지원군을 강조하기 위해 지원군 기관지 발행도 서둘렀다.
 
지원군 출병 2개월 후, 워싱턴 주재 인도대사 판디트가 중국을 방문했다. 모스크바 주재 대사도 역임한 판디트는 네루의 여동생이기 전에 탁월한 외교관이었다. 파닉카와 함께 저우언라이와 두 차례 회담한 후 워싱턴으로 돌아가 미국 정부와 접촉했다. 저우언라이가 어떻게 홀려놨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늘어졌다. 중국입장 설명에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참전 이후, 중국 지원군은 연합군과 다섯 차례 대형 전투를 소화했다. 1951년 6월에 들어서자 전선에 변화가 생겼다. 38선 부근에서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유엔군의 주축은 미군이었다. 나머지 국가의 출병은 상징성이 강했다. 예외도 있지만, 우리 국군이나 미군보다 전투력이 떨어졌다. 싸울수록 강해지는 것은 우리 국군과 북한 인민군이었다. 미군은 2차 세계대전 이래 만나본 적이 없는 얄궂은 상대를 만나 곤욕을 치렀다. 애꿎은 부녀자와 민간인들에게 무뢰한 행동도 많이 했다.
 
미국은 넌덜머리가 났다. 여러 경로 통해 소련 측에 중재를 요청했다. 인도도 그중 하나였다. 일단 군사행동을 중지하고 화의 담판 열자는 조건이었다. 6월 초순, 소식이 평양과 베이징에 전달되자 김일성이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과 정전문제를 협의했다. 마오는 김일성을 존중했다. “2주 전부터 전선에 총성이 그쳤다. 직접 소련에 가서 스탈린과 협의해라. 우리는 가오강(高崗·고강)을 파견하겠다. 대동해라.”
  
스탈린 “중국, 고무나무 농장 설립 검토를”
 

한국전 참전을 대기하는 동북변방군. [사진 김명호]

스탈린은 김일성과 가오강에게 전선 상황을 물었다. 통역 스저(師哲·사철)가 구술을 남겼다. “스탈린은 현실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전선의 현재 상황과 전투를 계속 할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남북 쌍방의 군대가 점거 중인 진지의 위치와 우열도 상세히 물었다. 당장 정화(停火)가 좋은지, 한차례 전투 치른 후에 전선 위치 수정하고 정전 논의하는 것이 유리한지 알고 싶어했다. 김일성과 가오강은 말이 많았다. 정화, 정전, 강화, 휴전, 화약 등 온갖 용어가 난무했다.”
 
스탈린이 두 사람의 말을 막았다.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직감에만 의존하는 산만한 학생 타이르듯이 입을 열었다.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완전히 다른 의미의 어휘를 혼동해서 쓰다 보면 상대방이 너희들의 의견을 이해하지 못한다.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만 복잡해진다. 요구가 뭔지 정확하게 말해라.” 김일성과 가오강이 동시에 정전이라고 하자 스탈린이 다시 물었다. “그냥 정전이냐? 아니면 전선을 한차례 조정한 후에 정전이냐? 현재 포위되거나 포위 중인 부대와 지역이 있느냐?” 두 사람은 대답을 못 했다. 소련군 참모차장이 지도 펼쳐놓고 한차례 설명하자 스탈린은 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오쩌둥이 지원군 파견 계기로 소련제 무기 탐낸 것처럼, 스탈린도 중국에 탐나는 물건이 있었다. 회담이 끝나자 가오강에게 고무농장 얘기를 꺼냈다. “하이난다오(海南島)와 레이저우(雷州)반도는 물론이고 광저우(廣州)에도 고무나무 재배가 가능하다고 들었다. 귀국하면 대규모 고무농장 설립을 검토해봐라. 고무는 전략물자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전략물자다. 묘목은 우리가 보내주겠다.” 가오강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6월 23일, 유엔 공보처 주최 방송의 날 기념식이 열렸다. 소련 유엔대표 마리크가 연단에 올랐다. 한국전쟁의 평화적 해결을 제안했다. “정화와 휴전 담판을 위해 양측 군대는 교전을 멈추고 38선에서 철수해라.” 비무장 지대 설정을 언급하는 내용이었다. 중국도 6월 25일과 7월 3일, 인민일보 사론을 통해 마리크의 제안을 수락했다. 7월 10일, 2년에 걸친 지루한 담판의 막이 올랐다.
 
<계속>
 
※사족(蛇足) 전쟁 초기, 함흥교도소는 38선 이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미 공군도 이곳에는 폭탄을 투하하지 않았다. 북한이 우익인사 대부분을 수감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