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대를 기억하는 방식은 과거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기 위해 랜드마크 형 사건에 대한 기록보다는 개인의 디테일한 추억담을 쌓아간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거대한 비극 속에 갇힌 소소한 일상의 기쁨들로 소환해 낸다. 영화의 세계관이 비관보다는 낙관에 근거하고 그래서 ‘영화=영화인’이 진보적인 데는 그런 이유 때문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대뜸 출현해 화제를 몰고 와 이제 개봉을 준비중인 독립영화 <벌새>는 ‘1994년=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 매우 놀라운 영화다. 1994년에는 두 가지 큰 사건이 있었는데, 하나는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이 죽었고 또 하나는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일은 한국 현대사를 기록하고 있는 역사 책에 볼딕체로 쓰여져 있을 만큼 큰 사건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맨 앞으로 내세워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냥 지나가는 양 묘사된다. 김일성이 죽자, 주인공 아이 은희(박지후)가 머무는 입원실의 아낙네들 목소리가 보이스 오프로 흘러 나온다. “김일성은 안 죽을 줄 알았어.”
오동진의 라스트 필름2. (영화평론가 오동진의 영화에세이)
은희가 세상을 의식하고 인식해 내는 데 있어 ‘영매’ 역할을 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한문 학원 선생인 영지(김새벽)는 명백히 운동권 출신처럼 보이는데, 어린 은희에게 세상이 녹록치 않음을, 늘 정의와 부정의가 교차하며 운영되고 있음을 가르쳐 준다. 영지는 은희에게 새 스케치 북을 선물하는데 이는 빈 여백에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 보라는 뜻으로 느껴진다. 그 누구보다도 올바른 선생이었던 영지는 성수대교 붕괴로 허무하게 사망한다. 은희는 영지의 죽음으로 어리고 성긴 세대에서 그 위로 성장한다. 점프 컷의 느낌으로. 이제 은희는 아직 어리지만 단순하게 어리지는 않다. 다들 그렇게 크고 성장했다. 그렇게 1994년을 경과했으며 한 시대를 뛰어 넘었다.
<벌새>의 제목 ‘벌새’는 가장 작고 여린 새지만 그 작은 날개짓 때문에 꽤나 요란한 새로 인식되곤 한다. 이 영화를 만든 81년생 김보라 감독은 자신의 인생에서 그리고 우리의 현대사에서 1994년이 그렇게 가장 요란하고 일이 많았던 시절이었다고 입증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 증언의 방식이 너무 특별해서 진실로 모두의 가슴에 와 닿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심지어 1994년이라는 틀조차 뛰어 넘어 과거의 특정한 시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현재를 다시 직시하게 만든다. 1994년의 그 극렬했던 시대를 겪었던 우리 모두는 지금 어디에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자분자분 캐묻게 만든다. 그 질문의 방식이 의외로 치열해서 놀라게 된다.
영화 <벌새>는 지난해 만들어져 올해 선보이는, 지난 1년간 만들어진, 작지만 태산(泰山)같은 작품이고 조용하지만 역설적으로 선언적이며 큰 울림이 있는 영화다. 영화 한 편이 때론 어둡고 얼룩졌던 과거의 시대를 정리해 내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새 인생을 시작할 명분과 계기를 만들어 준다. <벌새>가 한동안 그 역할을 해 낼 것이다. 젊은 영화는 이래야 한다. 좋은 영화라면 그래야 한다. <벌새>는 한국의 영화가 새로운 세대로 넘어가고 있음을, 아니 이미 넘어갔음을, 그래서 그 이양(移讓)에 대해 지극히 안심해도 된다는 것을 혁혁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