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조치란 적개심의 명백한 징표다. 청·일, 러·일 전쟁 때는 조선을 강제로 떼 내 합병한 일본이, 백여 년 후 지금, 중·북·러 진영으로 밀어내는 저의는 무엇인가? 금수조치에 전쟁을 불사했던 나라가 금수조치로 전쟁을 방지한다는 모순된 언명을 어떻게 세계에 납득시킬 수 있는가. 고작 위안부 합의 파기, 징용 배상 판결을 했다고 ‘불신국가’로 낙인찍는 저 졸렬한 행동은 전범 조부(祖父)의 황도노선에 대한 사적 봉공인가, 아니면 팔굉일우(八紘一宇) 깃발로 수백만 명을 살상한 야만을 아예 잊었다는 뜻인가?
금수조치는 적개심의 징표
‘용서한다’가 평화의 심성, 일본은?
불신국가는 속죄하지 않는 일본
망망대해 떠도는 독부가 될 것
몇 년 전, 난징학살추모관에서 만난 대학생은 시진핑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다.’ 수십만 동족의 죽음을 어찌 묻을 수 있을까만, ‘용서한다’는 그 한 마디가 평화의 심성이다. 전범 일본은 이런 토대를 만들었는가? 1955년생 필자는 어떤가? 나의 ‘적의’는 100만 징용자의 강제노역, 수만 징병자의 죽음, 수천 명 무고한 조선인의 학살 현장에서 피어오른다. 3·1운동 당시 농민, 학생시위대 교살 장면은 분노를 현재화하고야 만다. 가해는 다르다. 가해 당사자가 죽으면 기억은 묻힌다. 독일처럼, 지도자가 꾸준히 기억을 들춰내지 않으면 ‘현시대사(史)’가 되지 않는다.
1954년생 아베는 아니다. 그는 전쟁세대가 이웃 나라에서 벌인 잔인한 범죄를 죽은 조개처럼 역사의 무덤에 버렸다. 하얼빈에서 난징, 미얀마에서 남양군도까지, 평화·속죄를 담은 일본조형물은 없다. 대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피해 위령탑을 세웠다. 그렇게 둔갑한 역사를 밟고 선 아베의 대륙 ‘적개심’과, 식민지민의 통한이 일상 속에 재현되는 필자의 ‘적의’ 사이에 접점이 있을 리 없다.
급부상한 중국, 틈을 노리는 러시아, 핵보유국 북한의 위협 앞에 아베는 화려했던 제국(帝國)이 일개 민족국가로 축소되는 위기감을 느꼈을 터이다. 한국의 북한 포용정책도 심각한 위협이기에 차제에 ‘일본 대(代) 대륙’의 원점에서 전의를 다지고 싶은 게다. 섬나라로 위축된 불만을 확산해 혐한(嫌韓) 강병(强兵)의 길로 나서는 아베의 일본에겐 안중근 의사의 질책이 딱 들어맞는다. ‘용과 호랑이 위세로 뱀과 고양이 행동을 한다.’ 110년 전,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에서 이렇게 썼다. 서세동점 환란, 특히 러시아의 위협을 동양인이 일치단결해 막는 것도 벅찬데, “어찌하여 동종인 이웃 나라를 치고 우의를 끊어 스스로 방휼지세(蚌鷸之勢)를 만드는가?”
전범국가 일본에 묻는다. ‘조개와 도요새가 물고 물리는 형세’를 이 시대에 다시 연출해서 무엇을 꾀하고자 하는가? ‘이웃 나라를 해치는 자는 독부(獨夫) 신세를 면치 못하거늘’, 한국을 대륙에 밀어붙이고 일본은 망망대해를 떠도는 독부가 되려 하는가?
그대들이 짓밟은 이웃 나라의 고통을 진정으로 공감한다면, 5억 달러 보상금이 시대사적 고통, 인륜적 패악을 완치한다고 생각하는가? ‘불신국가’는 외려 전쟁범죄를 망각한 자국 일본임이 분명해졌다. ‘동양평화론’의 대국적 가르침으로 쇠붙이의 유혹을 겨우 진정시켰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