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조치로 1112개 품목이 수출규제 영향권에 들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화이트리스트에서 빠지더라도 당장 수출규제가 이뤄질지는 알 수 없다. 산업계는 어떤 품목이 규제될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우는 한편, 일본 수입의존도가 높은 품목을 중심으로 대체품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국내 영향 어떻게 되나
지난달 4일 포토레지스트(감광액)·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품목에 대해 수출규제를 겪은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는 수출규제 확대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EUV 공정은 기존 불화아르곤(ArF) 노광 공정에 비해 짧은 파장으로 미세한 반도체 회로를 그릴 수 있다. 웨이퍼당 생산효율과 제품성능을 높일 수 있다. 블랭크마스크는 유리기판 위에 반도체의 미세회로를 형상화하는 포토마스크의 원재료다. 국내에서도 에스앤에스텍이 블랭크마스크를 생산하지만 호야가 세계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고, 기술격차도 꽤 크다.
하지만 에칭가스·포토레지스트보다는 대체 가능성이 크다는 게 국내 반도체 업계의 설명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블랭크마스크의 일본 수입의존도가 높긴 하지만 지난달 1차 수출규제 품목들에 비하면 재고도 충분히 확보돼 있고, 대체 가능성도 큰 편”이라고 말했다.
반도체의 바탕이 되는 실리콘 웨이퍼도 일본 수입의존도가 높지만, 대체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게 관련 업계의 설명이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미세공정 웨이퍼 시장점유율은 일본 신에츠·섬코 등이 50% 넘게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웨이퍼 업체인 SK실트론의 기술 수준이 높아 일본산을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포토마스크의 오염을 막아주는 펠리클, 웨이퍼 연마장비인 CMP 등 반도체 제조 장비 역시 일본 의존도가 높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핵심 소재의 대체품을 개발하고 기존 장비의 성능을 높이는 등 일본 수출규제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 배터리, 분리막 日의존도 높지만 대체 가능
산업계에선 한국의 핵심 수출 품목인 자동차 분야의 타격 역시 우려하고 있다. 우선 피해가 예상되는 분야는 전기차용 배터리와 수소전기차의 수소연료저장용기를 만드는 탄소섬유 분야다.
전기차 배터리는 LG화학·삼성SDI·SK이노베이션 등 국내 업체들이 세계 최고의 제조 기술력을 갖고 있다. 문제는 핵심소재를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기차 배터리는 양극재·음극재·전해액·분리막 등 4대 핵심소재로 이뤄지는데, 일본 업체는 분리막의 시장점유율이 높다. 도레이·아사히카세이 등 업체가 삼성SDI와 LG화학에 분리막을 공급한다.
국내에선 SK이노베이션 자회사인 SK아이이테크놀로지가 고품질 분리막을 생산한다. SK이노베이션은 일본 분리막 업체가 한국 수출을 제한할 경우, 경쟁사에 분리막을 공급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경쟁사이긴 하지만 한국 배터리 업체에 분리막을 공급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기술 유출 건을 놓고 LG화학과 소송을 벌이고 있지만 국익 차원에서 LG화학에도 분리막을 공급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탄소섬유, “6개월 내 대체할 수 있다”
탄소섬유의 경우 일본의 세계 시장 점유율이 60%가 넘지만 6개월 이내에 국산 제품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게 관련 업계의 분석이다. 탄소섬유는 현대자동차의 수소전기차 넥쏘에 들어가는 수소연료 저장용기와 수소충전소용 저장용기 등에 사용한다.
현재 넥쏘에 들어가는 수소연료 저장용기는 국내 기업인 일진복합소재에서 만든다. 이 용기의 소재로 쓰이는 고강도 탄소섬유는 일본 도레이의 국내 투자법인인 도레이첨단소재 구미공장에서 생산해 공급한다.
핵심 중간재인 프리커서(Precursor·원료섬유)는 일본에서 들여오고 국내에선 이를 탄화(炭化)해 탄소섬유를 생산하는데, 프리커서 자체는 전략물자에 속하지 않는다. 다만, 전략물자인 탄소섬유의 원료나 설비를 전략물자로 간주할 경우 수출이 규제될 수 있다.
문제는 시간이다. 인증 절차에 최소 6개월이 걸리고, 대체재의 물성(物性)시험, 양산 테스트 등이 필요하다. 물론 수소전기차·충전소용 물량이 아직 많지 않고 재고가 충분해 당장 생산에 차질을 빚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국내 탄소섬유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방윤혁 한국탄소융합기술원장은 “한국의 탄소섬유 기술은 선진국을 거의 따라잡았다”며 “이번 기회에 산업의 기반 경쟁력이 되는 소재 분야 투자를 늘려야 미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석유화학, 국내 생산 여력 충분해
일본 수입의존도가 높은 일부 석유화학제품 역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전망이 있다. 하지만 국내 유화업계에선 국내 생산 여력이 충분하고, 공급선이 다양해 버틸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일본 수입의존도가 높은 품목으론 자일렌과 톨루엔 등이 있다. 자일렌은 페트(PET)병과 합성섬유를 만드는 테레프탈산(TPA)의 원료인 파라자일렌(PX)을 합성하는 데 쓰인다. 톨루엔 역시 파라자일렌을 만들거나 시너 등 도료를 만드는 데 쓰인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자일렌을 10억8500만 달러(한화 약 1조 2908억원)어치 수입했다. 일본 수입 비중은 95.4%나 된다. 톨루엔의 경우 4억7500만 달러(약 5651억원)어치를 일본에서 사들였다. 톨루엔 역시 일본 수입 비중이 79.3%에 달한다.
애초에 일본이 석유화학 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를 강행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현재 현대코스모 등 업체가 일본으로부터 자일렌과 같은 석유화학 품목을 들여오고 있는데, 현대코스모는 현대오일뱅크와 일본의 코스모오일의 합작사다. 업계에선 합작사가 수입하는 품목에 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를 적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본다.
석유화학 원료를 꼭 일본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업계 관계자는 “물리적 거리가 가깝기도 하고, 일시적으로 일본산 제품의 가격이 낮은 경우나 물량을 맞춰야 하는 상황에는 일본에서 수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도 충분히 구할 수 있는 품목”이라고 설명했다.
체력 부족한 중소기업 피해 우려
반도체·자동차 등 대기업 분야에 관심이 쏠리고 있지만 실제 피해가 커질 수 있는 분야는 중소기업 업종이란 우려도 있다. 특히 각종 공작기계나 수치제어반의 경우 일본 제품의 대체재가 있더라도 가격이 비싸거나 운용 노하우가 없어 바꾸기 어렵단 주장이다.
기계공작업체 관계자는 “일본산 공작기계나 소형로봇 등이 국내에서 애프터세일즈도 편리하고 가격 면에서도 저렴하다”며 “대체품으로 바꾸면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성철 단국대 기계공학과 교수는 “공작기계의 핵심부품인 수치제어장치(CNC)의 경우 대부분 일본산 제품을 쓰기 때문에 일본이 수출을 제한할 경우 기계산업 전반에 타격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일본 제품에 익숙한 현장 기술자가 많고 성능대비 가격경쟁력이 높아 대체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동현·임성빈 기자 offramp@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