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홍미옥의 폰으로 그린 세상(30)
"떠리미요, 떠리미! 이렇게 싼 물건은 난생 못 봤을 기요. 봤이믄 봤다 카소! 몽땅 개 값으로 던지고 갈라누마. 아 서울 자식놈 찾아 갈라누마. 누구든지 몽땅 가지믄 수 터지요! 개 값이오 개 값!"
여름이면 뜨거운 자갈길을 신발 벗고 가던 방물장수였다. 겨울이면 해장국 한 그릇에 찬밥 한 덩이 말아 먹고 주막집 처마 밑에서 해 뜨는 하늘을 바라보던 늙은이, 이 장에서 저 장으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떠돌아 다니면서 지난해에도 그랬었고 그 전 해도, 아마 십 년 전에도 그랬으리라.
-박경리 소설 『토지』중에서
문학작품 속의 장터는 현실에서도 살아 숨 쉬고
하지만 노인의 등장은 평범한 독자의 눈에는 파장을 앞둔 시골 장터와 너무도 어울렸다. 흙바람은 불어대고 새 주인을 찾지 못한 물건을 주섬주섬 담는 주변 장사치들의 미소까지 연상되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다녀온 서울 동묘(東廟) 벼룩시장의 켜켜이 쌓인 헌 옷가지가 주던 그 느낌처럼!
언제부턴가 온라인상에서는 삼국지의 관우(關羽)를 아느냐의 여부가 상식의 척도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중년인 우리 세대야 '아니 삼국지의 관우를 모른단 말이야?' 하고 되물을 게 뻔하지만 그게 그런 것만은 아닌가 보다. 물론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겠지만 책 읽을 시간조차 부족한 우리 청춘들에겐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겠다.
삼국지의 그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서울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의 이름, 혹은 TV 프로그램에서 유명 연예인의 언급으로 익히 아는 동묘시장임에도 불구하고. 동묘(東廟)는 임진왜란 때 지원병을 이끈 명나라 장수가 관우의 음덕을 기리고자 세워진 사당이란다.
이런 사연을 지닌 동묘 주변에 약 600여개의 좌판이 모여 시장을 이룬 게 동묘시장이다. 중고가구부터 골동품, 가전제품, 헌책, LP판, 구제 의류 등이 수북이 쌓여 풍성한 만물상을 이루고 있는 국내 최대의 벼룩시장이다.
내겐 쓸모없음이 누구에겐 필요한 세상의 축소판
컨셉도 따로 없다. 팔 수 있는 건 모조리 다 나와 있는 골목 언저리에 진을 치고 있다. '설마 저런 걸 누가 살까?' 싶은 물건들이 당당하게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곳. 어제도 그제도 혹은 지난달에도 그 자리에서 새 주인을 만나기만 기다렸을 물건들이다.
앞서 언급한 소설 토지의 장터 늙은이처럼 목청 좋고 비위는 더 좋을 성싶은 상인이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한다. 오늘 아니면 이런 명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며 딱 하루만 파는 유럽 명품가방이 단돈 이만원이란다. 이름만 대면 드르르한 유명 탤런트가 들다 내놓은 가방이라는데 뭐…. 루×땡, 구×. 에르×스 등등 도도한 명품(?)들은 이곳에서 귀한 대접은 받지 못한다. 대접은커녕 가자미눈으로 그걸 의심스럽게 살펴보는 고객이 다수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상인은 계속 목청을 높인다. '못 사면 바보, 그래도 안 사면 진짜 바보'라면서 말이다. 건너편 가게에선 진짜 송나라 도자기라는 물건들이 삼만 원 남짓에 팔리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벼룩시장의 한판 놀이에 기꺼이 나도 비집고 들어갔다.
하지만 벼룩시장의 고물 속 보물을 찾아내기란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무리 봐도 이걸 돈을 주고 산다는 게 이해되지 않을뿐더러, 누군가에게 발견될 흙 속의 진주는 당최 보이지 않는다.
옆자리, 벼룩시장의 쇼핑 고수인듯한 아주머니는 면장갑에 마스크까지 하고 먼지 속 옷더미를 헤집고 있다. 수북한 옷더미를 헤집는 폼이 여간 고단수가 아니다. 마침내 유명상표의 등산점퍼를 단돈 오천 원에 득템 하는 실력을 보여주고야 만다. 분명 내 눈엔 보이지 않았던 물건이다. 희색이 가득한 그는 검정 비닐봉지를 흔들어대며 부지런히 갈 길을 재촉한다. 아마도 주말쯤에 청계산이나 수락산에서 자줏빛 등산점퍼의 그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햇빛, 먼지와 싸우다 이내 물러서고 말았다. 아직은 쇼핑 내공 절대 부족이다. 누구에게 버려졌던 물건이 누구에겐 즐거운 주말 산행을 함께하는 물건으로 변신하는 동묘 벼룩시장! 소설 속 대사처럼 누군가는 수 터지는 하루요, 누군가는 헐값에 아까운 물건을 내놓았다고 외치는 정겹고도 신나는 장터 풍경이었다.
할 수 없다. 오늘은 시장의 명물이라는 토스트를 맛보는 거로 만족할 수밖에. 아뿔싸! 줄이, 줄이 너무 길다. 뜨거운 햇볕을 피해 지하철역으로 뛰어갈지, 긴 줄을 서고라도 뜨끈한 시장 토스트의 달달함을 맛볼지 그것이 문제로다 후후훗!
홍미옥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