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왕'이 된 큰 영웅
‘엑스칼리버’는 지난해 ‘웃는 남자’로 온갖 뮤지컬상을 휩쓴 제작사 EMK뮤지컬컴퍼니의 세 번째 창작뮤지컬이다. 2013년 뉴욕에서 개발돼 2014년 스위스에서 ‘아더 엑스칼리버’라는 타이틀로 초연한 작품이지만, EMK가 '인핸스먼트' 계약을 통해 월드와이드 판권을 확보하고 규모를 키워 재창작했다. 비영리 극단이 소규모로 개발한 작품을 상업프로덕션이 대규모로 키우는 것은 브로드웨이에서는 일반적인 제작방식이고, 국내에서도 '공연예술 창작산실' 등 창작자 인큐베이팅 시스템을 통해 개발된 작품이 상업프로덕션으로 옮겨가는 패턴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유주현 기자의 컬처 FATAL]
뮤지컬 '엑스칼리버' 8월 4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뮤지컬 '신과 함께 이승편' 6월 29일까지 LG아트센터
‘엑스칼리버’는 그간의 EMK 창작물과 마찬가지로 작가·연출·작곡가등 주요 창작진이 모두 미국인이다. 흥미로운 건 이 미국인들이 모두 “미국에서도 불가능한 스케일”이라고 혀를 내두른다는 점이다. 사실 요즘 공연계는 세트 규모를 줄이고 디지털 기술 등을 활용해 무대를 심플하게 만드는 트렌드다. 이런 추세에 정색하고 반대하는 엄홍현 프로듀서는 ‘돈 아끼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쏟아부은 최고의 무대를 관객에게 보여주겠다’는 평소 철학 그대로, 100억대 제작비를 투여한 스케일의 미학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일단 배우 규모부터 상식을 넘어선다. 통상 대극장 뮤지컬은 출연진이 30~40명 임에 비해, 서울예대와 산학협력을 체결해 동원한 38명의 학생 앙상블을 포함한 70명이 넘는 출연진을 국내 최대 규모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 세웠다. 울창한 실제 숲을 옮겨다놓은 듯 공간감 넘치는 세트와 엑스칼리버가 꽂혀있는 거대한 바위산은 초반부터 시선을 압도한다. 클라이맥스인 빗속 전투씬은 또 어떤가. 전면 샤막(반투명 스크린)에 실제 물줄기를 뿌리는 뒤로 50명 규모의 대규모 앙상블이 칼싸움을 슬로우 모션으로 펼치는 인해전술, 거기에 그림자극을 활용한 후면 영상으로 깊이를 더해 3단 스펙터클을 완성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뮤지컬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의 음악도 무대 스케일에 뒤지지 않는 웅장하고 호소력 짙은 넘버들을 쏟아냈다. 시종 비장한 결의를 다지는 주인공 아더 외에 악녀 모르가나의 신비하고도 강렬한 고음, 기네비어와 랜슬럿의 서정적이고 로맨틱한 멜로디까지, 총 38곡에 달하는 넘버들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수많은 작은 영웅이 건재한 세상을 꿈꾸며
‘신과 함께’는 ‘엑스칼리버’와 여러 모로 대조적이다. 한국적 창작뮤지컬을 개발하는 서울예술단이 우리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는 웹툰 컨텐츠를 소재로 ‘지금·여기·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미 ‘쌍천만 영화’로도 잘 알려졌듯, 재개발을 위해 철거를 앞둔 달동네에서 갈 곳 없는 조손가정을 지키는 가택신들과 할아버지를 데려가려는 저승차사들의 시선을 통해 철거민들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화려한 도시에서 더 이상 쓸모없다고 내쳐지는 존재들이 ‘같이 좀 살면 안되냐’는 아우성이랄까.
저승차사와 염라대왕, 각종 신들이 등장하는 판타지지만, 전설 속 인물이 주인공이 아니다. 신화에서 소환한 신적 존재들은 관찰자이자 조력자일 뿐, ‘신과 함께’의 영웅은 현실을 사는 평범한 청년이다. 김태형 연출과 한아름 작가는 원작에서 비중이 작았던 용역알바 박성호(오종혁 분)를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들어 전면에 부각시켰다. 알바비를 떼이고 대출금 갚을 길이 막막한 순수한 청년 박성호는 정규직 제안에 솔깃해 철거용역 회사에 취업한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부조리에 눈감고 철거민을 위협하며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지만, 결국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 이 땅의 수많은 박성호를 위해 진실을 말하겠다”고 외치는 작은 영웅이 된다.
제작비는 ‘엑스칼리버’의 10분의 1도 안되는 9억이지만, 이 ‘작은 영웅’의 활약도 꽤 볼만 하다. 철거민 시위대와 용역 알바, 경찰의 대치 장면 슬로우 모션은 색슨족과 아더왕의 전투 만큼이나 스펙터클하고,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며 오종혁이 치켜든 방망이도 김준수가 치켜든 엑스칼리버 만큼이나 비장해 보였다. 박동우 무대미술가가 원세트로 구현한 소박한 달동네 풍경도 아름다웠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동네 ‘한울동’의 동그랗게 뚫린 하늘 위에서 신들이 마을을 지켜보는 구도를 만들고,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알록달록 크레파스 그림 영상은 물량이 아닌 감성으로 대극장을 꽉 채웠다. 창작뮤지컬의 신화 ‘빨래’의 민찬홍 작곡가의 넘버들도 ‘빨래’의 ‘참 예뻐요’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손자 동현 역의 이윤우군도 아역 출연자답지 않은 뛰어난 실력으로 성인 배우 못잖은 감동의 비중을 차지했다.
대극장 뮤지컬은 관객을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차원의 세계로 가게 할 때 독특한 감동이 생산되고, 거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최근 몇년 새 다양해진 컨텐츠와 높아진 우리 창작진의 능력치로 인해 대극장에도 여러 색깔의 무대가 가능해졌음을 느낀다.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황당한 판타지라도 소극장 뮤지컬처럼 일상적 공감을 이끌어낼 때 색다른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신과 함께’는 이 화려한 세상에서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것들에 관한 리얼한 이야기다. 달동네 가난한 이웃들, 항아리 같은 오래된 물건들, 어쩌면 우리가 믿어온 신까지도 이제 필요 없다고 생각하게 된 세상에서, 그럼에도 우리에게 신화가 필요한 이유는 뭘까. 철거 직전의 달동네에도 비극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것,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돕고 있는 어떤 커다란 힘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싶기 때문 아닐까. 바위에서 영검을 뽑을 만한 커다란 영웅은 영영 나타나지 않겠지만, 수 많은 작은 영웅이 건재한 세상은 꿈꿀만 한 것 같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