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어촌 선술집 주인이 불러준 ‘돌아와요 부산항에'

중앙일보

입력 2019.06.24 13:00

수정 2019.06.2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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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홍미옥의 폰으로 그린 세상(29)

아오모리현의 어촌마을 하치노헤의 작은 선술집 '프린스'. 작고 낡은 이곳은 자칭 한류 극성팬이라는 노부부와 아들이 운영하고 있다. 갤럭시탭 S3,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에~~~오”
얼마 전 영국 런던 웸블리에서 울린 이 함성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BTS와 그의 팬 아미들이다. 그룹 퀸을 기리며 “에~~오”를 부르는 한국 청년들. 그동안 웸블리는 우리에겐 전설의 록 밴드 퀸과 비틀스, 최근엔 손흥민으로 기억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리 청년들이 K-pop 한류의 정점을 찍고 있었다. 쏟아져 나오는 기사와 각종 뉴스만으로도 전 국민을 흐뭇하게 만드는 한류. 하지만 나도 한류라면 남 못지않은 추억이 있다. 일본 북쪽의 어촌에서 만난 정겹고 소박했던 한류다.
 
내가 만난 소박하고 정겨운 한류
일본 아오모리 현에는 하치노헤(八戶)라는 항구도시가 있다. 현 내 제2의 도시라고는 하지만 어촌마을의 풍광을 지닌 곳이다. 그곳엔 남편의 후배가족이 살고 있다. 하치노헤에 거주하는 유일한 한국인 가족인 셈이다. 강제노역으로 끌려와 이곳에 남게 된 한국인들이 더러 있었지만, 귀화하거나 세상을 뜬 연유로 그리되었다고 한다. 하치노헤의 유일한 한국인 가족인 후배는 그곳의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다.
 

하치노헤의 가쿠인대학(八戶學院大學). 이곳 거주 중인 유일한 한국인이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진 홍미옥]

 
대학교 견학 후 자연스럽게 시내 관광이 이어졌고 밤이 되자 식사자리는 가벼운 술자리로 이어졌다. 하치노헤의 명물인 작은 박스 모양의 선술집이 몰려있는 거리를 지나서 좁고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섰다. 어디선가 비릿한 바다 내음과 함께 어느 술꾼이 저지르고 간 지린내까지, 과히 산뜻한 곳은 아니었다.


벽에는 짙은 초록의 방수 페인트가 덕지덕지 발려있었다. 흘러간 유행가의 노랫말에나 나올 것 같은 외관의 낡은 술집이다. 프린스라는 꽤 고급스러운(?) 이름의 간판을 걸고 있지만, 과연 누가 이런 구석까지 찾아올까 싶기도 했다.
 
내부는 아주 작았는데 낮은 천장엔 누군가가 남기고 간 수백, 수천장의 명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촌스러운 색색의 조화가 그 사이사이를 어색하게 장식하고 있는 완벽한 B급 정서의 카페다. 여기 프린스는 70대 부부와 아들이 경영하는 작은 가게였다. 요란하게 번쩍이는 파란 공단 셔츠의 주인과 한 눈에도 어색한 샤기 컷 가발을 쓴 여주인이 우릴 맞아주었다.
 
혹시 한국에서 왔냐며 화들짝 반가워하는 여주인이 말을 건넨다. 하치노헤에서 한국인을 만나기란 흔치 않은 일인데 잘 되었다며 뭔가를 주섬주섬 꺼낸다. 그가 내민 건 정성스레 스크랩 한 오래된 사진과 기사 한 귀퉁이였다.
 
한국 스타와의 특별한 인연을 보물로 간직하고 있는 여주인

하치노헤의 선술집인 ‘프린스’의 입구(왼쪽). 작고 낡았지만 정겹고 소박한 정서를 갖고 있는 지역 명물로 유명하다. 내부로 들어서면 방문한 손님의 명함과 어설픈 종이꽃과 유치한 조명으로 꾸며졌다(오른쪽). [사진 홍미옥]

 
이야기는 30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우연히 방송에서 이미자의 ‘아씨’라는 노래를 듣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게 그렇게나 끌리더란다. 점점 앨범을 사 모았다. 한국어를 배워서 따라 부르고도 싶었지만, 태평양 연안의 작은 항구도시 하치노헤엔 변변한 한국어학원이 있을 리 만무했다. 지인에게 이미자의 CD를 선물하면서 거의 반강제적(?)으로 팬클럽을 만들고, 이윽고 공연을 보기 위해 드디어 한국 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의 추억이 되살아나는지 여주인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내내 함박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는 발음도 정확하게 세종문화회관을 아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곳 맨 앞자리에서 이미자의 공연을 보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더라는 거였다. 그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며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가사의 의미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이 공연 내내 눈물을 흘리는 걸 마침 가수가 본 모양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대기실로 그를 불러 기념사진도 찍고 대화도 나누는 즐거운 시간을 갖게 되었다며 자랑스러운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여주인이 내민 주름지고 빛이 바랜 스크랩북에는 한결 젊고 예쁜 그와 역시나 그만큼 젊은 이미자가 웃고 있다. 여주인은 이건 자신의 보물 1호라며 정성스레 사진첩을 만지고 또 만진다. 자신은 '동백 아가씨'보다 '아씨'를 더 좋아한다며 첫 구절을 흥얼거렸다.
 
하치노헤 항(港)에서 부산항을 부르는 사람들

여주인이 낡은 스크랩북을 건넨다. 몇십 년이 흘렀건만 보물 1호로 간직하고 있다는 사진이다. 가수 이미자와 젊은 시절의 그가 웃고 있다. [사진 홍미옥]

 
그때였다. 여느 남자들이라면 절대 입지 않을 패션인 파란 공단 블라우스의 주인장이 끼어든다. 한국에서 찾아주신 손님들을 위해 노래선물을 드리고 싶다는 거다. 먼저 주인장이 선창한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어? 이건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아닌가. 그러자 좀 전까지는 이미자의 팬이었던 여주인이 정확한 음정과 발음으로 다음 구절을 부른다. 이어서 서빙 중이던 젊은 아들이 끼어들어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실내에는 우리 말고도 대여섯 명의 손님이 있었다. 퇴근길에 한 잔의 술로 피로를 푸는 평범한 직장인, 바닷가에서 방금 일을 마치고 온 듯한 작업복차림의 중년 남자들이 그들이다.
 
흡사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그들도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거 아닌가! 어쩜! 가사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부를 수가! 나만 해도 가사를 완벽히 외우지 못하는데 말이지…. 순식간에 좁은 실내는 한국가요의 선율로 가득 찼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우리 일행은 너무도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했던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웃음이 떠나지 않던 바닷가 마을의 사람들과 우리는 짧은 시간에 한결 가까워진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이 지역은 우리에겐 가슴 아픈 곳이다. 근처 미사와(三澤)라는 지역은 일제의 강제노역으로 한 맺힌 과거가 묻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일들이 무수히 남아 있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바다 내음 물씬 나는 아오모리현 하치노헤(八戶)! 비록 두 나라 사이엔 풀지 못한 어려운 일들이 쌓여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겐 서로를 알아가고자 하는 진심 또한 천천히 더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작고 소박한 한류는 그렇게 뜻하지 않은 곳에서 불쑥 손 내밀며 우릴 감동하게 했다.
 
홍미옥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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