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은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정문 앞에서 빅이슈 판매원으로 일해온 권모(74)씨의 마지막 출근 날이었다. 권씨는 2011년부터 8년 동안 매일 정문 앞 한자리에서 '빅이슈' 잡지를 판매해왔다.
권씨는 직접 그린 그림에 ‘사랑하는 이화인 여러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는 문구가 크게 적힌 현수막을 걸어 놓고 이날 오후 2시쯤부터 마지막 영업을 시작했다.
“시내 가면 누가 알아볼까 봐 대학가 왔죠”
빅이슈는 1991년 영국에서 노숙자의 자립을 돕기 위해 창간된 잡지다. 현재 11개국에서 발행되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빅이슈코리아’라는 이름으로 2010년 7월에 창간됐다. 노숙자가 스스로 빅이슈 판매원이 되기로 결심하면 2주간 임시 기간을 거친 후 정식 판매원이 된다. 그 후 6개월 이상 판매하고 꾸준히 저축하면 임대주택 입주 자격이 주어진다. 빅이슈 판매원은 잡지를 권당 5000원에 판매해 절반을 수익으로 가져간다. 빅이슈는 시중 서점에서는 판매되지 않는다.
빅이슈 판매원은 지정된 한 장소에서만 영업할 수 있다. 권씨가 이대 앞에 오게 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권씨는 “수익을 생각하면 시내나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리가 훨씬 좋다”며 “일반인들은 돈이 있어 판매도 더 잘 되지만 학생들은 용돈이나 아르바이트로 번 돈뿐이기 때문에 판매가 힘든 편”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학교를 선호한 이유에 대해서는 "돈보다 자존심 때문"이라고 했다. 권씨는 “옛날에는 나도 잘 나가던 사람이었는데 혹시라도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마주쳐 망가진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기 때문”이라며 “결과적으로 이곳에 와 학생들과 좋은 추억을 쌓게 됐다”고 말했다.
서예와 문인화에 능했던 권씨는 이대 축제인 ‘대동제’에 매년 참석해 재능기부로 학생들에게 캘리그라피와 그림을 그려주는 일도 해왔다. 권씨는 “그림을 받으려는 학생들 줄이 너무 길어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다”며 “축제 3일 내내 그림을 그리다 보면 몸살이 났다”고 회상했다.
2013년에는 이대 동아리에서 돈을 모아서 권씨에게 중고 바이올린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권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한 학생이 권씨의 오랜 꿈이 바이올린을 켜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 후 학내 마케팅학회 회원 14명과 함께 학회 예산을 아낀 돈으로 중고 바이올린을 선물했다. 권씨는 요즘도 집에서 심심할 때마다 바이올린을 켠다고 한다.
“할아버지 건강하세요”
인터뷰를 하던 약 1시간 동안 총 11명의 학생이 권씨를 찾아왔다. 학생들은 “건강하세요”라고 전하며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했다. 권씨는 “아쉽지만 이제 나이도 너무 들어서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을 나기가 너무 힘들어 일을 접으려고 한다”며 “앞으로는 강의하는 일을 몰두하며 여생을 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권씨는 학생들에게 악수를 청하며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전한 후 이대 앞을 떠났다.
“아마 다음 주면 새로운 판매원이 올 겁니다. 그분에게도 아저씨같이 많은 관심 가져주세요. 항상 공부 열심히 하고 사회의 리더가 되세요. 저도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박해리 기자 park.hae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