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는 전날 판문점 북측 지역인 통일각에서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이희호 여사 서거에 대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명의의 조화와 조전을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등에게 전달하는 장면을 촬영해 행사 이후 취재진에게 제공했다. 이날 통일각에는 정 실장 외에 서호 통일부 차관,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 윤건영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등이 동행했다.
정의용 실장-김여정 만나는 영상 통째로 묵음
이후 영상 28초부터는 김여정이 정 실장에게 조의문을 전달하고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김여정은 12초가량 말하는데, 이 부분은 입모양으로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어 정 실장이 19초 동안 말을 이어간다. 이 역시 알아들을 수 없다. 영상 전체가 묵음 처리됐기 때문이다. 영상 뒷부분 28초가량은 김정은 위원장 명의의 조화를 클로즈업해 보여주며 끝난다.
통일부 당국자는 13일 ‘북측의 (묵음 처리) 요청이 있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북한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안다”며 “(영상의) 유음, 묵음 문제는 내부의 문제”라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영상 제공 과정에서 여러 의사결정 단계가 있는데 당국자로서 책임감 있게 대처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앞으로는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같은 일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남북 간 몇 차례 행사에서도 통일부 제공 영상이 묵음 처리됐거나 북측 주요 인사의 발언이 편집돼 제공됐다. 이런 전례 탓에 통일부 기자단은 전날 정부에 영상 제공 시 ‘묵음 처리를 하지 말아줄 것’을 수차례 요청했다.
이 여사의 서거로 갑작스럽게 마련된 자리였지만, 지난 2월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남북이 석 달 넘게 정체기였던 만큼 남북 고위급 인사의 만남은 주요 취재 사안이기 때문이다. 애초 현장 취재가 가능했다면 영상 묵음 논란은 벌어지지 않았을 문제였다.
그러나 통일부는 통일각 출입 관련 유엔사의 허가, 아프리카돼지열병 방역 절차 등의 이유를 들어 취재진의 현장 취재에 난색을 표했다. 대신 통일부가 신속하게 영상과 사진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남북 간 회동은 남북 관계의 특수성, 사안의 민감성 탓에 상대방 측의 요청이 있을 경우 협의를 통해 조정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행사의 경우 북측의 요청이 따로 없었는데도, 영상이 묵음 처리된 건 정부의 과도한 북한 눈치보기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익명을 요청한 북한연구기관 관계자는 “하노이 이후 남북관계가 워낙 살얼음판이라 정부가 북한과 빌미를 만들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것 같다”며 “그만큼 남북 관계에 여유가 없고, 정부의 운신의 폭이 좁다는 방증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백민정 기자 baek.min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