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때는 더 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11년 전 음담패설 테이프가 공개된 것에 사과하기는커녕 “힐러리의 남편(빌 클린턴)은 나보다 훨씬 더 심하다. 난 말로 했지만, 그는 행동으로 했다. 빌은 여성을 학대했다”고 몰아세웠다. 또 “힐러리를 감옥에 보내겠다”고까지 했다. 미 언론들은 “역사상 가장 추잡한 토론”(폴리티코)이라고 비난했다. 토론의 승자를 묻는 여론조사 결과는 57%(클린턴)대 34%(트럼프). 여전히 압도적 차이였지만 뭔가 이상했다. 격차가 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3차 토론 때는 52%대 39%.
언론이 막말 감별사가 될 수는 없어
‘대통령 비판’ 모조리 막말 아니지만
‘어떻게’ 비판할진 치열히 고민해야
트럼프 세상이 된 미국은 이제 ‘트럼프 언어’에 둔감, 아니 무감각해진 상태다. 웬만해선 놀라지도 않는다. 그러니 민주당 1인자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트럼프 탄핵보다 퇴임 후 감옥에 있는 걸 보고 싶다” “(트럼프의 무역협상전략은) 분노 발작”이라 외쳐도 큰 뉴스거리조차 되질 않는다. 트럼프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미 국민 54%는 내년 트럼프의 재선을 예상한다. 입(口)이 세 개 모여 품(品)이 된다고 했는데, 필자는 ‘미국의 품격’은 이미 땅에 떨어졌다고 본다.
최근 북한 문제에는 엇박자를 내는 한국과 미국이지만, ‘말의 품격’에 있어선 철저한 동조화가 이뤄지고 있는 느낌이다.
“문재인은 빨갱이”부터 시작된 게 하루가 멀다고 “(문 대통령의 북유럽 방문은) 천렵질에 정신 팔린 사람마냥 나 홀로 냇가에 몸 담그러 떠난 격”, “그래서 우짤낀데?”로 이어지고 있다. 여당은 “막말 수도꼭지다. 토가 나올 지경”이라 맞선다. 솔직히 난 우리 언론이 툭하면 ‘막말’이란 딱지를 붙이는 데는 거부감이 있다.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 언론을 많이 접해봤지만 ‘막말’이란 단어는 거의 쓰지 않는다. 그저 ‘차별 발언’, ‘거친 비판’ 정도로 묘사한다. 언론이 ‘막말 감별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판단은 국민 몫이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 비판은 모조리 막말인가”(민경욱 대변인)란 자유한국당의 울분과 하소연도 이해는 간다.
다만 이 논쟁의 핵심은 뭐가 막말이고 아니냐가 아니라, 보통 중도층에게 거북한 표현들을 왜 서로 경쟁적으로, 자기 맘대로 쏟아내느냐다. 우리가 트럼프의 나라와 똑같이 될 순 없지 않나. 19세기 마지막 위대한 진보주의자로 불린 영국의 언론인 출신 정치인 존 몰리는 “누가 말하는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떻게 말하는가, 이 셋 중에서 무엇을 말하는가가 가장 ‘덜’ 중요하다”고 했다. 난 대다수 우리 국민 생각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 믿는다. 치열하게 권력을 비판하라. 다만, 어떻게 비판할지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