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안혜리의 시선] 정권 최고 실세는 이슬만 먹고 살 수 있나

중앙일보

입력 2019.05.31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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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논설위원

권력 실세는 이슬만 먹고도 살 수 있나. ‘문재인 정부 최고 실세’라는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이 지난 14일 취임 일성으로 무(無)급여를 선언했다는 소식을 듣고 맨 처음 든 궁금증이었다. 본인의 직접 설명은 없었지만 민주당 관계자 입을 통해 “1호 업무지시가 무급여”라며 “사심 없이 당에 헌신하겠다는 의미”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주로 현직 의원이 겸직했던 과거와 달리 양 원장은 다른 밥벌이가 없는 상근자라, 주변에서는 생계를 위해서라도 월급을 받아야 한다고 권했지만 “실세라 월급 받는다”는 불필요한 오해를 받기 싫다는 본인 의지가 확고했다고 한다.
 
사심·헌신·오해…. 이런 키워드에 내년 총선을 기필코 승리로 이끌겠다는 양 원장의 절박함이 담겼으려니 하면서도 한편으론 의아했다. 바뀐 규정상 받을 수도 있었던 멀쩡한 월급인데 무슨 그리 큰 오해를 받는다고 고사한 걸까.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나 장하성 주중대사처럼 수십, 수백 억원대 자산가도 아니고 교사 아내를 둔 기자(언론노보)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 청와대 비서관 경력이 사실상 경제활동의 전부인데 무슨 쌓아둔 돈이 있어 월급을 마다할까. 뉴질랜드로, 일본으로, 또 미국으로 떠돌았던 지난 2년간은 뉴질랜드 사는 형 도움도 받고 지난해 3만 권 팔았다는 책 인세(출판계 관행상 4500만원으로 추정)로 그럭저럭 충당했다 쳐도 앞으로는 무슨 돈으로 다양한 비용들을 감당하려 하나. 판공비를 사적으로 쓸 수도 없는 노릇인데 엄청난 자기절제를 필요로 하는 대단한 희생이 아닐 수 없다.

양정철, 오해 싫다며 월급 고사
‘사적 회동’의 비싼 밥값 궁금
‘컬링과 커피믹스’ 교훈 새겨주길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희생인가. 그리고 이 헌신에는 어떤 대가가 기다리고 있을까. 이런 궁금증이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던 와중에 양 원장이 서훈 국가정보원장과 지난 21일 일인당 한 끼 식사값이 10만원 안팎인 서울 강남의 고급 한정식집에서 4시간 넘는 비공개 만찬을 했다는 보도가 최근 터져 나왔다. 식당주인이 양 원장을 태운 모범택시 기사에게 5만원을 쥐어주며 택시비를 대신 내주는 사진도 함께 공개됐다. 양 원장 스스로  “총선 승리의 병참기지 역할”이라고 정의했듯이 그는 여당의 총선 전략을 짜는 최고 실세다. 이런 인물이 국가 최고정보기관 수장과 장시간 비공식적으로 만난 것이나 식당주인에게 택시비를 대납받은 건 어떻게 봐도 부적절하다. 오해가 무서워 월급도 안 받는다더니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이런 처신에는 “사적인 지인 모임”이라고 선을 그으며 “공직에 있는 것도 아닌데 일과 이후의 삶까지 주시받아야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린다.
 
4시간 넘도록 민감한 얘기 하나 안 했다는 해명을 믿기도 어렵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소소한 궁금증은 여전히 남는다. 식당주인은 진작에 각자 밥값 계산했다고 딱 한 마디만 했으면 좋았을텐데 굳이 “백수인 줄 알고 택시비는 대신 냈지만 밥값은 누가 냈는지 말 할 수 없다”고 입을 다물었고 양 원장은 “현금 15만원을 미리 (본인 식사비로) 냈다”고 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돈은 어디서 나왔을까. 판공비일까, 개인돈일까. 사적 모임이라면 개인 호주머니에서 나가야 마땅하지만 월급 한 푼 없는 양 원장이 교사 아내에게 용돈 받아 냈을 것 같지는 않다.
 
국정원의 정치개입 의혹 같은 심각한 정치적 공방이 오가는 마당에 한 끼 밥값이 어디서 나왔는지가 무슨 대수냐고 타박할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꼭 그렇게 볼 문제는 아니다. 양 원장의 취임 이후 벌어진 일련의 소동을 지켜보면서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불거진 여자컬링 횡령사건 당시 한 직장인이 SNS에 쓴 글 하나가 떠올랐다. 야근비를 제대로 챙겨주는 회사가 드물던 시절 첫 직장에서 만난 부서장은 “야근 하면 반드시 야근비를 청구하라”고 주문했단다. 몇 시간이라도 공짜로 일해준다는 생각이 들면 처음엔 회사에서 커피믹스 한두 개나 A4 용지 하나 정도 집에 가져가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결국엔 회삿돈과 개인돈 구분이 없어져 큰 부정을 저지르게 된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이 직장인은 ‘컬링 대부’ 김경두 일가가 ‘팀킴’ 상금을 횡령한 건 용납할 수 없지만 자기 땅을 무상으로 기증까지 했던 그들 눈엔 이 정도 상금은 평생 헌신한 대가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 썼다. 내돈, 남의 돈 경계가 모호해지는 건 물론이요 헌신의 청구서를 내미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는 얘기다. 이슬 말고 강남 한정식 먹는 실세가 헌신을 내세워 무월급 선언한 걸 마냥 선의로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양 원장은 이 정권에 부채를 떠안기지 말고 지금이라도 일한만큼 월급을 받으면 좋겠다. 그게 정권과 본인 모두에게 혹시 닥칠 지 모를 불미스런 일을 방지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