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5월 14일 서울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상 뒤편에 임시로 차려진 옥외 레스토랑에서 수만원 값어치는 되어 보이는 저녁 식사를 대접받았다. 퇴근길 회사원들을 포함해 300명 가까운 시민들이 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수십 개 원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었다. 부산, 광주, 대구, 순천에서 올라온 초청객들도 있었다. 앞머리의 따온 글은 이 행사가 시작될 때 상영된 동영상 창작품 ‘미세먼지와 싸우는 시민의 용기’에 나왔던 글귀다. 미세먼지 가득한 대도시 한복판에서 수백명 시민이 두 시간 동안 집단으로 밥을 먹는 행위는 비장미 풍기는 일종의 전위예술이었다. 사람들은 테이블에 놓인 산소캔을 밥 먹는 중간중간 흡입했고 방독면을 쓴 색소폰 연주 등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이색 퍼포먼스들이 이어졌다.
광화문 광장 최초 야외 레스토랑
중증 호흡기 질환 셰프가 던지는
“공기는 만인 앞에 평등” 메시지
3분 30초간 윤경숙의 인사말은 자동차 소리와 매연 자욱한 레스토랑의 소란함을 잠재웠다. 윤경숙은 서울 유명 백화점 한식집의 남부럽지 않은 오너 셰프다. 하루하루 요족하게 살만한 환경이다. 그럼에도 윤경숙이 미세먼지 속 밥 대접 퍼포먼스를 한 까닭은 누구라도 나서 제 가진 것으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자각 때문이다. 그에겐 이 땅에서 깨끗한 식재료를 확보해야 한다는 신앙 같은 본능이 있는데 하늘의 ‘독개스’(그는 미세먼지를 독개스라고 불렀다)가 그걸 해치고 있다고 봤다. 땅의 식재료든 하늘의 공기든 한쪽이 병들면 다른 쪽이 아프다는 게 윤경숙의 생애를 관통하는 체험이다. 광화문 레스토랑에 울려 퍼진 “한국인은 호흡 공동체, 생명 공동체”라는 합창엔 미세먼지와 싸워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시민 행동가의 호소가 섞여 있다. 그는 자기 사재의 일부를 털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국내외 각종 다이닝 쇼를 지휘하면서 갈고 닦은 무대연출 재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광화문 레스토랑은 윤경숙이라는 몸매 가냘픈 폐질환자가 없었다면 열리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 어벤져스에만 영웅이 등장하는 게 아니다. 엿새 전 광화문 광장에서 나는 어벤져스 이상으로 실감 나는 시민 영웅을 보았다. 이 글은 우리 안에 잠자는 시민적 각성을 일으킨 한 여성 셰프에 대한 오마주다. 무슨 일만 생기면 정부가 다 알아서 해결해 준다는 환상적 풍조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시민이 아니라 정부가 영웅 행세를 하는 나라는 위험하다. 시민 스스로 영웅이 되어야 한다.
전영기 중앙일보칼럼니스트